서울 12.6º
미세먼지 좋음
강릉 15.2º
미세먼지 보통
)
바다에서 파도가 일었을 때 하얗게 부서지는 물거품을 메밀꽃이라 부른다. 마치 안개꽃처럼 작고 하얀 꽃이 만개한 메밀밭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이효석은 단편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눈 쌓인 들판처럼 한밤중에도 주변을 환하게 밝혀주는, 꽃이 흐드러지게 핀 메밀밭을 서정적으로 묘사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허 생원과 그 일행은 장사가 신통찮은 봉평장에서 일찌감치 철수하여 다음 행선지인 대화장으로 길을 잡았다. 낮에는 장사해야 하므로 주로 밤에 이동하는데 그날 밤에는 마침 보름달이 뜬 데다 메밀꽃이 활짝 피어서 산길은 밝고 꽃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 길에서 나눈 대화로 허 생원은 일행 중 한 명인 동이가 자신의 아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동이의 어머니가 자신이 평생 마음에 담아둔 여인일 수도 있다는 기대에 그녀가 산다는 충주로 동이와 함께 가보기로 한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어설픈 복선도 눈에 뜨인다. 하지만 1936년에 쓰인 이 작품에서 여운을 남기는 열린 결말 등 현대적 요소가 사용되었다는 점만으로도 이 소설의 문학사적 가치가 돋보인다.
백석이 표현한 메밀냉면의 맛과 흥취
메밀을 꽃으로 감상하는 것은 초가을 한철이지만 메밀 알곡은 국수 등으로 일년내내 즐길 수 있다. 평안남도 정주 출신인 시인 백석은 메밀냉면의 맛은 물론 국수를 준비하고 먹기까지의 흥취를 ‘국수’라는 시에 낱낱이 표현해놓았다.
우선 마을 사람들이 모여 국수를 만들어 먹는 날은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날여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는 날이다. 한 마디로 일하기 마땅치 않은 날 국수 잔치를 벌이는 것이다.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김칫독 묻어 둔 움막)로 가고’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국수 재료를 장만하느라 저마다 분주하다.
국수 재료인 메밀은 ‘어늬 양지 귀 혹은 능달 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가장자리) 예데가리 밭(산 위 비탈밭)에서’ 나와 ‘하로밤 뽀오햔 힌 김 속에 접시 귀 소기름 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산무애뱀·이무기) 같은 분틀(국수틀)을 타고’ 당도한다.
국수 맛에 대해서는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 ‘겨울밤 쩡하니 익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고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 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샅방 쩔쩔 끓는 아르궅(아랫목)을 좋아하는 이것’이라고 표현했다.
마을을 흥성흥성 들뜨게 하는 메밀국수
이 국수는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이며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인데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 볓 속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여러 겹 쌓인) 꿈을 지나서/ 지붕(지붕)에 마당에 우물 든덩에 함박눈이 푹푹 싸히는 여늬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 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반가운 것’이다.
백석의 다른 시 ‘산숙(山宿)’ 중에는 ‘여인숙이라도 국숫집이다/ 모밀가루 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웃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 하다 / 나는 낡은 국수 분틀과 그즈런히 나가 누워서’라는 구절이 있다. 앞의 시 ‘국수’에서 메밀이라는 단어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백석이 시에 담은 ‘국수’의 재료가 메밀이었음을 짐작하게 해주는 작품이다.
논 농사에 실패했을 때 심는 대체 작물
예전에 메밀은 논 농사에 실패했을 때 심는 대체 작물로도 재배되었다. ‘태종실록’ 1414년 5월 14일 기사에는 ‘영길도(함경도) 갑산의 속현인 허천 등의 지경에 서리가 내렸다. (…) 화곡(벼과 곡식)이 말라 죽으니, 모두 번경하여 메밀을 심었다’라고 쓰여 있다. 번경은 논이나 밭을 번갈아 경작하는 것을 말한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태종 임종 무렵 가뭄이 심해서 태종은 자신이 죽어 혼이 있다면 비가 오게 하겠다는 말을 남겼고 이후 태종의 기일마다 비가 내렸는데 사람들은 태종이 상제에게 빌어 비가 내린 것이라며 이 비를 태종우(太宗雨)라고 불렀다고 한다. 위 실록 기사가 쓰인 음력 5월14일은 태종우가 내린다는 5월10일과 가까운 날짜다. 서리뿐만 아니라 봄 가뭄에 시달릴 때인 것이다.
메밀의 원뿌리는 땅속 90~120cm까지 달해 가뭄에 강하다고 한다. 그러니 가뭄이 심해 논바닥이 갈라질 지경이라도 메밀 농사는 지을 수 있었던 듯하다. 메밀은 아름다운 꽃으로, 재해에도 잘 자라나는 식량 작물로, 양봉을 위한 밀원 등으로 다양하게 유익한 식물이다. 그럼에도 메밀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분명하게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자신의 존재가 부각되지 않아도 맡은 바를 다하는 성실한 일꾼을 닮았다고나 할까.
[글 황인희 사진 윤상구]
후원하기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좋아요
감동이에요
화나요
슬퍼요
추천해요6
좋아요5
감동이에요4
화나요0
슬퍼요0
연재기획 ‘반대세의 비밀’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기사제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