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새로운 핵합의 협상 요구에 대해 압바스 아락치 이란 외무장관이 ‘미국과의 간접협상에 열려 있다’면서 직접협상 가능성을 일축했다. AFP통신에 따르면 아락치 장관은 24일(현지시간) “이슬람공화국(이란)에 대한 (미국의) 접근 방식에 변화가 있을 때까지)”라고 단서를 붙이며 미국의 ‘최대 압박’ 정책이 유지되는 한 직접 상대하진 않겠다고 밝혔다. 강경하지만 여지를 열어둔 태도로 읽힐 만한 반응이다.
2015년 7월 이란의 핵프로그램을 동결·축소를 조건으로 제재를 해제하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미국·러시아·중국·프랑스·영국) 및 독일 등 6개국과 핵합의(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가 타결됐었다. 그러나 3년 뒤 들어선 트럼프1기 행정부는 합의상의 허점을 짚으며 JCPOA 탈퇴 후 제재를 복원했다. 원유대금 약 70억 달러(약 8조3000억 원)가 한국에 동결됐던 게 이 때문으로 이란의 해외 동결자산 가운데 최대 규모였다. 이 문제는 2023년 8월 미국과 이란 사이 수감자 협상 조항에 포함돼 4년3개월 만에야 풀린다.
재집권한 트럼프가 핵협상 재개를 촉구하는 서한을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에게 보냈다고 7일 공표하자 열흘 후 이란 측에서 ‘서한 수령’을 확인했다. 이란에 ‘2개월 시한’과 ‘불응할 경우 군사행동을 취할 수도 있다’는 내용의 트럼프 서한에 아락치 장관이 “거의 위협”이라고 반발하면서도 서한을 계기로 일부 기회가 열릴 수 있다며 조만간 응답할 것을 예고했다. 1기 이래 트럼프는 ‘이란 핵개발 원천 봉쇄’ 원칙에 확고하다.
중동 내 유일하게 온전한 의미의 현대국가인 이스라엘과 또 다른 친미국가 사우디아라비아를 엮어 나머지 아랍국가들을 재편하는 게 트럼프의 구상이다. 이것이 이른바 ‘아브라함 협정’의 골자이며 궁극적으로 이슬람신정국가 이란의 무력화를 뜻한다.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외교관계 수립 및 대사관 개설 직전에 이란 지원의 하마스 기습으로 일단 무산됐지만 트럼프의 이란 압박은 계속될 전망이다.
미 국무부가 최근 이란산 에너지 수입국인 이라크의 제재면제 혜택을 갱신하는 등 이란 돈줄 끊기에 박차를 가했다. 대통령 서명의 안보각서에 의거한 미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이 지난달 초 보도자료를 통해 이란산 원유의 중국 수출 국제 네트워크를 제재한다고 발표했다. OFAC은 유령회사 세페르 에너지 등 중국·인도·아랍에미리트(UAE) 등 여러 관할구역의 단체·개인·유조선을 제재대상 목록에 올렸다.
미국은 이라크를 향해 “가능한 한 빨리 이란 에너지 의존을 없애라” 촉구했다. 이란산 에너지가 이라크 전력 소비의 4%에 불과하지만 수십년째 원유 수출만으로 견뎌 온 이란으로선 뼈아픈 손실이다. 다만 “불법적 행위” “반인도적 범죄”라며 목소리를 높일 뿐 대책이 안 보인다. ‘핵이란에 반대하는 연합’(UANI)이 2024년 이란의 원유 수출 91%가 중국행이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중국이 다른 나라 석유로 위장해 수입하는 운송망 구축으로 작년에만 358억 달러(약 48조8000억 원)를 이란 손에 쥐어줬다. 이 중 상당 부분이 (팔레스타인)하마스·(예멘)후티·(레바논)헤즈볼라에게 들어간다.
2002년 1월 G.W.부시 미 대통령 신년 국정연설 때 북한·이란·이라크 세 나라가 국제테러 지원 정권 ‘악의 축’으로 지목됐다. 그해 8월 이란 반정부 단체 ‘국민저항위원회’에서 자국 중부 나탄즈 지역 우라늄 농축 시설의 존재를 폭로해 비밀 핵개발 의혹이 불거졌으며 미·이란 관계는 한층 악화일로를 걸었다. 냉전 초기만 해도 미중동 전략의 양대 축이 사우디와 이란이었고 이란의 핵프로그램 개시 또한 미국 도움 덕분이었으나 1979년 이란은 혁명을 통해 서방과 적대적 관계가 돼 현재까지 45년째 제재 대상이다.
부시 후임인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하고 이란에선 2013년 5월 중도파인 하산 로하니 대통령이 정권을 잡아 양국 사이에 변화가 생긴 적이 있다. 그 2년여 후 오스트리아 빈에서 JCPOA 체결로 신국면을 맞이한듯 보였다. 이란의 농축능력·우라늄 비축량을 제한해 단기간 내 핵무기 제조를 막고 이란·아라크에 위치한 중수로 설계를 바꿔 무기급 플루토늄의 생산을 저지하며 사찰을 지속한다, 이란이 이를 성실하게 이행한다면 제재를 해제해 나가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2017년 첫 임기 초반의 트럼프는 JCPOA가 미 역사상 ‘최악의 거래’였다고 비판하다 이듬해 5월 합의를 공식 탈퇴하며 제재 복원를 선언했다. 이에 이란은 우라늄 농축 수준을 계속 높였고 바이든정부 들어 빈에서 협상이 재개됐으나 지지부진했다. 바이든정부 시절 내내 이란에 휘둘리는 모양새였다. 2021년 6월 이란 대선에서 당선된 강경 보수 성향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이 미국의 일방적 탈퇴에 책임을 물어 배상 및 전면적인 제재 해제를 요구했다. 가셈 솔레이마니 혁명수비대 사령관 암살을 지시한 트럼프를 살인혐의로 법정에 세울 것도 주장했다.
솔레이마니 사망 2주기를 맞아 2022년 1월 초 미군과 그 우방국을 향한 동시다발적 공격 또한 이어졌다. 미국과 이란의 근본적인 입장차가 최대 쟁점이다. 제재 먼저 해제하라, 이란이 합의 이후 위반한 조치를 우선 철회하라, 양쪽 주장이 팽팽히 맞선다. 미 민주당 정부의 유화적 자세를 틈타 그간 기술적 진전을 이룬 이란이 버틸 힘을 비축한 측면도 있다.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의 2021년 이란 핵활동분석 보고서는 이란이 3주 이내 핵무기용 농축 우라늄 확보가 가능하고 6개월 내 지하 핵실험 실행 역량을 갖췄으며 고성능 원심분리기 건설 및 운영도 추진 중임을 지적했다. JCPOA 합의 당시 때보다 운반수단 기술도 발전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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