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쓰는 역사 [14] 베르사유 프티 트리아농에 가득한 라일락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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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꽃을 사랑한 비운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스카이데일리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6-03 09:24:28

▲ 연보랏빛 라일락꽃은 비운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연상케 한다. 윤상구 사진작가

꽃의 매력을 결정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다. 장미나 목련·양귀비처럼 겉모습에 우선 눈길이 가는 꽃이 있는가 하면 존경하는 분께 바치는 카네이션이나 눈 속에서 피어 봄을 알리는 매화처럼 그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오는 꽃도 있다. 향기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인데 은은한 향기가 먼저 떠오르는 대표적인 꽃은 바로 라일락이다.

라일락은 온대지방이라면 어디서든 볼 수 있고 종류도 많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수수꽃다리도 그 일종이고 ‘미스김라일락’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품종도 있다.

1947년 미군정청 소속 식물채집가가 도봉산에서 라일락의 일종인 털개회나무 종자를 채취해 개량했는데 당시 자료 정리를 도왔던 한국인 여직원의 성을 따서 미스김라일락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정략 결혼의 대표적 희생자 마리 앙투아네트

진한 향기를 널리 퍼뜨려 사람의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는 라일락. 하지만 그 연보랏빛 라일락꽃을 보면 혁명의 격랑에 휩쓸려 비참하게 죽어간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떠올라 마음이 쓸쓸해진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라일락꽃을 유난히 사랑했다고 한다. 루이 16세 재위 시 베르사유궁 내실의 커튼과 의자들이 연보랏빛으로 장식된 것도 우연은 아닌 듯하다.

마리 앙투아네트만큼 혹독한 시집살이를 겪은 여자도 드물 것이다. 그녀에게는 프랑스 국민 거의 전부가 적대적인 ‘시집 식구’였다. 사이가 좋지 않은 두 나라의 화해를 위해 열네 살 어린 나이에 낯선 프랑스로 시집가야 했던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 그녀의 시련은 결혼 약속 때부터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1770년 라일락꽃 피는 5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국경을 따라 흐르는 강의 모래섬, 사람이 살지 않는 그곳에 작은 천막이 하나 차려졌다. 엄청나게 화려한 기마 행렬의 호위를 받으며 비엔나로부터 온 마차 하나가 천막 앞에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앳된 소녀는 천막 안으로 들어가 조국 오스트리아에서 가져온 모든 물건을 내놓았다.

입고 있던 드레스는 물론 머리 장식·신발·양말·리본에 품에 안고 온 강아지까지. 소녀는 실오라기 하나 못 걸친 알몸이 되었지만 강을 건너려면 오스트리아 물건은 단 하나도 지닐 수 없었다. 조금 후 소녀는 프랑스 옷으로 갈아입고 천막을 나섰다. 그녀는 프랑스 왕세손비 마담 라 도핀느 마리 앙투아네트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던 왕비

▲ 라일락은 무엇보다 은은한 향기가 먼저 떠오르는 꽃이다. 윤상구 사진작가

혹독한 통과 의례를 거치고 어머니 나라의 모든 것을 버리고 왔지만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시기와 질시·험담과 조롱은 끊이지 않았다. 그녀를 주인공으로 삼은 가짜 뉴스가 하나 만들어지면 거기에 눈덩이처럼 더 심한 가짜 뉴스가 붙어 걷잡을 수 없이 치명적인 모략으로 이어졌다.

그 대표적인 것이 빵을 달라며 굶주린 민중이 폭동을 일으키자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요!”라고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말했다는 것이다. 이는 안 그래도 성난 파리 시민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하지만 왕비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왕비는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 자신의 드레스를 팔고, 악마의 음식이라고 불린 감자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기 위해 감자꽃을 머리에 꽂았다고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 루이 16세로부터 베르사유 정원 구석의 작은 궁전 프티 트리아농을 선물 받았다. 왕비는 이 궁전을 물레방앗간이 있는 시골처럼 꾸며 놓고 라일락꽃 향기 속에서 조용히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호화 별장을 짓고 사치와 환락을 누린다며 구설수에 올랐다. 그녀의 사치 행각에 돈을 대느라 프랑스의 재정이 고갈되었다는 터무니없는 말도 사실처럼 돌아다녔다.

나름 검소하고 소박했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일상

혁명이 일어나고 수많은 오해와 모함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두대로까지 몰고 갔다. 하지만 그녀의 시중을 들던 캉팡 부인은 실제 그녀의 삶은 나름 검소하고 소박했다며 “왕비는 아침 식사로 초콜릿이나 커피를 마시고 정찬 때는 흰 살코기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음료수도 고작 물뿐이었다. 저녁 식사 때는 고기 수프·닭 날개 요리·비스킷 몇 개를 물에 적셔 먹는 정도였다”고 회고록에 썼다.

세상은 가끔 아니 자주 전혀 예상할 수 없고 뜻하지도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도 그 파도에 휩쓸려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을 겪곤 한다.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전기소설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와 프랑스혁명’에서 “착한 뜻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악한 의도를 품은 것도 아니었다”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성품을 표현했다.

“명랑하고 구김살 없던 그녀의 세계 안에 혁명이 들이닥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수많은 다른 황녀처럼 평범하게 인류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을 것”이라는 츠바이크의 말대로 예기치 못한 혁명의 세찬 소용돌이 속에서 안타깝게 희생된 마리 앙투아네트. 매년 봄 프티 트리아농 정원을 가득 채우는 라일락꽃 향기도 그녀의 영혼을 위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글 황인희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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