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 View] 느림이 아니라 느긋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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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유이 문화팀장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6-28 00:02:40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동문선)가 국내 독서계에 파란을 일으킨 게 2000년 여름의 일이다. 속도에 적응하는 것이 잘사는 것이라는 믿음이 공식화되던 시기 쌍소는 느리게 걷고, 천천히 읽고 쓰면서 삶을 음미할 것을 권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2004년 KTX가 개통되었고 다시 20년이 흘렀다. 나이 든 철학자의 권유가 무색하게 한국은 점점 더 빠른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고속철도를 통해 생활 반경은 넓어졌지만 그만큼 현대인은 더 많은 일을 하게 됐다.

최근 문화계를 관통하는 두 가지 화두는 ‘느림’과 ‘뉴트로’다.

한 시간에 352km를 주파하는 3세대 고속열차 ‘KTX-청룡’이 등장하고 6GHz의 클록 속도(컴퓨터 프로세서의 동작 속도)를 자랑하는 인텔 14세대 CPU가 출시되는 이때 다시 느림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뭘까.

한편 뉴트로는 복고에 새로움을 입혔다는 뜻이다. ‘팬탁스’에서 필름카메라를 선보이고 MZ세대 사이에서 통바지·긴 양말·래글런 티셔츠가 유행하면서 회자되기 시작한 신조어다.

이에 발맞추듯 국토교통부와 한국철도공사가 22일부터 ‘자전거 간이역 탐방열차(에코레일)’ 운행에 들어갔다. 완행으로 운영되는 에코레일은 객차 4칸·카페 객차 1칸·자전거 거치용 열차 1칸으로 구성돼 있으며 좌석 규모는 총 256석이다.

서울역·대전역에서 충북 영동군 추풍령역까지 열차로 이동한 뒤 여기서부터 자전거를 이용해 인근 간이역인 황간역·각계역·심천역 등을 둘러보게 된다.

영동 심천역의 경우 1934년 일제의 근대 간이역 표준설계에 따라 지어졌다. 한국의 철도는 일제가 국토 수탈과 대륙 진출 목적으로 건설한 것이기에 이 시기 건설된 역사들이 그들의 표준설계에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제는 이 역을 건설할 당시 출입문 처마 위에 박공지붕을 얹어 마치 2층 건축물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당시만 해도 주변이 논두렁·밭두렁인 데다 건물이라곤 초가집 일색이었기에 2층처럼 보이는, 하지만 사실은 1층인 이 간이역만으로도 일제는 그들의 권위를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지금 이 간이역은 일반 주택보다도 규모가 작은 초라한 목조건물일 뿐이다. 국가에서 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그 사이 지상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역사 직원조차 배치되지 않은 낡고 작은 역을 ‘일제 식민의 잔재’라는 거대 카테고리로 묶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수탈과 착취의 냄새가 걷힌 자리에는 추억이라는 이름의 아련함이 남게 되었다. 사람들은 추억 여행·낭만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간이역을 소비한다.

내친 김에 코레일은 8월부터 전통시장과 연계해 경북 예천 용궁역·문경 점촌역과 충북 영동 추풍령역을 경유하는 424석 6칸 규모 ‘간이역 순환열차(팔도장터관광열차)’를 운행할 예정이다.

이 상품은 용궁역·점촌역·추풍령역에 30분 이상 정차하면서 승객이 전통시장을 방문해 지역 특산물을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말하자면 한국식 쇼핑 열차인 셈이다.

또한 올해 말에는 경기 고양시에서 양주시를 거쳐 의정부시까지 경기 북부를 단선으로 연결하는 교외선 관광열차 운행이 20년 만에 재개된다. 이 열차는 고양 대곡에서 의정부까지 32.1㎞를 달리는 동안 능곡·원릉·일영·장흥·송추·의정부의 6개 역사를 지나게 된다.

속도에 중독되면 시속 352km의 열차도 지루하게 느껴지고 6GHz의 컴퓨터 속도도 굼벵이처럼 느리게 다가온다. 점층법(漸層法·점점 강하고 크고 높게 해서 절정에 이르도록 하는 표현법)은 국어 수사법이기 전에 본능의 법칙이다. 더 강력한 쾌락을 추구하다가 멸망에 이른 고대 도시들처럼 이 속도 끝에는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상대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토록 열망하는 행복이 속도나 첨단이라는 단어에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20년 전 쌍소는 “지금 정신없이 시간에 쫓겨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자유로운 시간을 갖게 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결국 바쁘게 살다 죽을 것이다”고 말했다.

느긋함은 게으름이나 무력감과는 다르며 느림이라는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자잘한 재미를 잃어버리면 중독의 늪에 빠지게 된다. 그게 마약이든 술이든 삶을 행복하게 해 주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알고 보면 간단하다. 하루치 일을 마치고 나면 쌍소의 조언 대로 걷고 읽고 쓰는 데 시간을 할애할 일이다. 이런 자잘한 자극에 노출된 뇌는 쉽게 쾌락의 미혹에 빠지지 않는다. 주말을 맞아 완행열차의 흔들림에 몸과 마음을 맡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임유이 문화팀장 lye@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