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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8·15광복 이후 정부 수립, 6·25전쟁과 빛나는 산업화 시기를 거쳐 대한민국은 오늘에 이르렀다. 격동의 한반도, 美CIA 요원으로 그 한복판에서 활약한 마이클 이 박사의 숨 막히는 체험…. 북한 정권의 실체와 광주5·18 등 좌경 친북세력이 주도한 사건들에 관한 증언과 분석,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 한반도의 미래에 관한 그의 이야기들이 값지다. 이에 美연방정부 공무원으로 살아온 40년 세월을 담은 그의 저서 ‘대한민국과 CIA’를 지면에 연재한다.
고마운 아내
울릉도에서 병아리 전도사 생활을 하다가 징집영장을 받고, 훈련소와 포병학교를 거쳐 대구의 부관학교 군사영어반으로 가기 전 한 달 동안의 휴가 기간 중에 나는 결혼을 했다. 결혼은 그렇게 하는 법이라고도 하지만 참으로 아이들 장난치듯 얼렁뚱땅 해 버린 결혼이었다. 결혼을 한 다음에도 아내와는 함께 살지 못하고 나는 부대에, 아내는 서울에 따로 살며 주말 부부로 지내는 신혼생활을 거쳐 우리에게도 첫 아이가 생겼다.
아이가 생겼지만 나는 아내를 부여의 친정집에 남겨 둔 채 서울로 올라와 일자리를 구하러 다녀야 했다. 일자리는 쉽게 구해지지 않고 난지도의 고아원에 얹혀살며 허드렛일을 돕고 지내던 나날, 그렇게 막막한 하루하루를 보내며 때때로 아내와 아기가 보고 싶을 때면 피마자밭에 들어가 별을 보며 눈물을 삼키던 일이 지금도 아련히 떠오른다.
그러다가 군사영어반에서 나를 눈여겨 봤던 부대장의 추천으로 뜻밖에 대방동의 미8군 528군사정보대에 취직이 되어 생각지도 못했던 심문관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드디어 직장을 구해 아내·딸아이 경실이와 날마다 얼굴을 마주하며 함께 살게 된 일은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다. 지난 번에도 언급했지만 하늘에서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해 내 삶을 바꿔 놓은 것만 같았다.
직장을 구한 덕분에 아내와 합쳐 살게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가난해서 셋방살이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 대방동에서 신길동으로 이사를 했고 신길동에서는 1962년에 큰아들 욱(旭)을 얻었고 1964년에는 막내아들 석(晳)이 태어났다. 그리고 1965년에는 신림동에 야채를 심을 수 있는 텃밭이 딸린 집터를 하나 사고 그곳에 집을 지었다. 아내와 나, 딸아이와 두 아들 우리 다섯 식구는 부자는 아니지만 크게 쪼들리는 일 없이 행복했다.
내가 퇴근을 하면 아내는 언제나 대야에 더운물을 담고 내 발을 씻어 주었다. 딸 경실이가 피아노 연습을 하면 마을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듣고 간다고 했다. 아내는 시장에 가서 식료품을 살 때 절대로 값을 깎는 일이 없었으며 불쌍한 할머니 앞을 지날 때는 당장 필요 없는 물건도 사 주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우리 집에서는 저 멀리 관악산이 보이며 매일같이 김포공항에서 이륙하는 국제선 여객기들이 보였다. 비행기가 날아올라 관악산을 넘어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때때로 한숨을 지었다. 누구는 팔자가 좋아서 저렇게 비행기를 타고 해외여행을 다니는데 나는 언제나 국제선 비행기를 타 보나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아마도 하나님이 내 속마음을 읽으신 모양이다. 1974년에 미국에 이민을 가서 연방정부에 취직이 되어 24년간 수십 번 해외 출장을 다니느라 지긋지긋하도록 국제선 비행기를 탔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말이나 생각이나 행동을 늘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다 보고 들으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형수와의 인격적 인간관계
502군사정보단에서는 보통 피심문자 한 사람에 대해 3∼4개월 동안 심문이 지속되곤 했다. 그렇게 몇 달씩 심문이 지속되는 동안 날마다 8시간을 질문·답변, 질문·답변으로만 진행하기 힘들다. 그랬다가는 심문관이나 피심문자나 모두 지루해서 지쳐 버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심문관은 매일 아침 상대자가 흡연자일 경우 양담배 한 갑을 지급하며 점심시간 외에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커피 마시는 시간을 갖고 심문 내용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잡담을 주고받는다. 세상 이야기·개인 신상 이야기·북한 이야기·남한 이야기·개인적인 체험담을 비롯해 학술·종교·예술 등 제한 없이 잡담을 하다 보면 심문관과 피심문자 사이에 인간적인 관계가 만들어진다.
피심문자와의 사이에 그렇게 인간관계가 만들어져 함께 낄낄대고 웃기도 하고 신이 나서 떠들기도 하다 보면 어떤 경우에는 예상 밖으로 새로운 정보의 단서가 잡히기도 한다. 이때 유능한 심문관은 지체 없이 “아까 그 얘기를 더 구체적으로 말해 봅시다” 하면서 노다지 같은 정보를 캐낸다. 피심문자 본인도 무심코 한 말인데 그 속에 우리가 원하는 중요한 정보가 들어있다는 사실은 심문관밖에 모른다. 여러 가지 심문기법 중에 이런 것을 ‘유발심문(elicitation)’이라고 한다.
심문관들이 사용하는 심문기법을 분류하면 △문답심문(interrogation) △유도심문(leading question) △청취심문(debriefing) △회견심문(interview) △유발심문 (elicitation)이 있다. 정해진 심문 순서와 단계를 초월하여 특종급 정보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심문관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기법을 사용하는데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피심문자와의 사이에 인격적 인간관계를 조성하는 일이다.
유능한 심문관은 피 심문자의 생일을 꼭 기억하고 있다가 챙긴다. 피심문자 자신도 잊고 지나가는 생일날에 특별히 식당에 생일 케이크와 특식을 주문해서 준비하고, 그날은 심문을 중단하고 생일파티를 열어 주며 시원한 맥주나 소주를 마시며 하루를 즐긴다. 이런 경우에 대부분 피심문자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그 이후로는 심문하기가 아주 편해져서 묻기도 전에 많은 정보를 자진해서 진술하게 된다.
그런데 나는 그 외에도 특별한 작업을 꼭 추가했다. 잡담 시간에 북한에서 무신론과 유물사관의 교육이 골수에 스민 그들에게 성경 이야기와 기독교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내게서 심문받은 대상자들 가운데 여러 사람이 석방 후에 교회에 가겠다고 약속했는데 개중엔 뭐가 뭔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형집행장에서 온 메시지
그때가 어느 해였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루는 한국군 법무장교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와 이런 말을 전했다. 내게서 심문받은 한 사람이 출소 후에 재판을 받고 사형 언도를 받았는데 사형집행 전에 세례를 받기 원해 목사 한 분을 초청하여 세례를 해 주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묻자 “대방동 수용소에 계시는 나를 담당했던 심문관 마이클 선생에게 안부를 전해 주시오. 그분 덕분에 내가 예수를 믿고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떠나간다고 꼭 전해 주시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나는 내 사무실 벽에 한 손을 짚고 흐느껴 울었다. 우연히 지나가다가 이 광경을 목격한 미군 장교 한 사람이 “마이클이 지금 울고 있다”고 부대장에게 보고를 했고 부대장은 나를 불러 내가 울어야 하는 이유가 무어냐고 물었다. 나는 그동안 피심문자들로부터 최대한의 협조를 얻기 위해 어떤 인격적 인간관계를 조성했으며 그리고 그 결과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가 심문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사형 언도를 받았는데 그가 예수를 믿고 사형 집행 직전에 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부대장은 내 말을 듣고 한동안 숙연한 표정을 짓고 있더니 말없이 일어나서 방을 나갔다.
다음 날 9시에 부대장은 모든 심문관과 장교들을 소집하고 긴급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심문관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유능한 심문관이 되기 위해서는 피심문자들과의 사이에 존경받을 만한 인간관계를 조성하라고 강조했다. 또한 앞으로 모든 심문관은 피심문자들의 생일을 꼭 챙겨 주라고 말하며 협조를 잘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서울 시내 관광을 시켜 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나를 지목해 “자네는 유능한 심문관일 뿐만 아니라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프로필
△ 美 연방정부 40년 근속
(DIA(Defense Intelligence Agency·국방정보국) 16년·CIA(중앙정보국) 24년)
△ 1976년 미국 외무고시 합격
△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정치학 박사
△ 美 국무성 동아시아 문제 수석연구원
△ 美 국무성 외교연수원 교수
△ 주한 미국대사관 정무관
△ CIA 한·미 안보협력 조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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