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157] 결혼식을 기다리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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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기다리는 남자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8-21 06:30:10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전화의 벨이 울렸다. 입력되어 있지 않은 번호. 뜻밖에도 유리의 목소리였다.

“식사하셨어요?”

밤 9시가 아닌 오전 9시에 듣는 유리의 질문은 어비수스만큼이나 비현실적이었다. 미용실에서 신부 화장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용서해 주세요”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오셔서 축하해 주실 거죠?” 하고 물었다. 마치 내가 가지 않으면 결혼식이 가능하지 않다는 듯 확답을 종용하는 것 같았다. 이 아인 왜 나란 존재에 이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용서를 강요받을 때보다 더 무거운 압박이 가슴을 짓눌렀다.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신혼여행은?” 하고 물었다.

“오늘 밤은 콘래드호텔에서 보내고 내일 아침 9시 비행기래요. 유럽으로 갈 건데요. 배낭여행이래요. 참, 여의나루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공항으로 갈 거래요. 그곳이 우리가 처음 시작된 곳이니까. 우리 영웅 씨 아이디어예요. 재미있겠죠?”

유리는 무엇엔가 쫓기는 사람처럼 흥분해서 숨도 쉬지 않고, 여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말을 늘어놓았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말은 이상하게 귀에 거슬렸다. 비행기래요? 배낭여행이래요?

“아, 헤어디자이너가 머리 말아야 한다고 전화 끊으래요. 아저씨, 꼭 오실 거죠?”

유리의 말투가 원래 이랬던가. 혼란에 싸여 있는 그녀의 불안이 내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그녀의 청을 기어코 수락한 건 그래서였다. 남의 말을 하듯 자신의 이야길 하는 것이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그래요. 갈게요.”

“아이 좋아. 꼭이요. 저랑 약속하셨어요. 꼭, 꼭 오셔야 해요.”

늘 훌쩍거리던 유리가 손뼉을 치며 하늘을 향해 폴짝폴짝 뛰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처음으로 제 나이의 밝고 철없는 아가씨답게 느껴졌다. 나는 약속하고 말았다. 약속해 놓고 안절부절못했다. 전화를 끊고서야 잊고 있던 유리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새삼스럽게 나를 극한의 감정으로 밀어붙였다.

나는 유리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건 불공평했다. 내가 속 좁은 사내라는 걸 깨닫도록 상황을 몰아 가는 것이 더 괘씸했다. 나는 앞으로 12시간 후 괴물로 변하고 고통에 짓눌려 죽을지도 모르는데 유리는 자신의 행복을 축하해 달라 조르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화가 치미는 것은 철딱서니 없는 어린 여자의 어리광을 냉정하게 거절하지 못한 나 자신의 우유부단함이었다.

하운은 접시를 싹 비우고 오렌지 주스를 반쯤 비웠다. 나도 토스트를 반쯤 따분하게 씹었다. 하운과 나는 교묘하게 서로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나는 창 너머 폭포를 주시했고 하운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톡톡 두드린 다음 또 한 모금 마셨다. 나도 그녀를 따라 어색하고 초조하게 톡톡, 두드렸다. 유리의 결혼식장에 가야 한다는 부담감, 오늘 하루 내가 해야 할 일들, 그 결과 나에게 내일이 있을 것인가 하는 불안이 나를 차분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 나를 지켜보는 하운의 마음도 편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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