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159] 정직하지 못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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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상상을 듣다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8-23 06:30:10

주결의 말처럼 당장은 상처가 되더라도, 사랑이란 정직해야 하는 것이다. 섹스 또한 누구도 기만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셋이든 넷이든 애초에 합의한 게 아니라면 한 여자에게만 나를 주어야 했다. 비록 하룻밤일지라도 상대가 나 하나만 받아들이는 것으로 약속된 것이라면 나 또한 한 번에 한 여자만 품어야 했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그러나 나는 달봉과 함께 있을지도 모를 아내에게 집착했다. 지난밤 내가 하운을 안는 매 순간 침대에는 하운과 나, 그리고 달봉과 아내가 함께 뒹굴었다. 하운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하면서도 그 두 사람이 맞이한 아침은 어떤 것일까, 나는 또 불안하고 초조했다.

아내에게 향해야 할 의심과 폄훼를 하운에게 퍼부으며 내 안에서 점점 꼬여만 가는 이 끔찍한 위악을, 나조차 내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비열함을 하운이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나는 이토록 추악한 미로에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길을 찾을 수 없었다.

“10분쯤 걸어가면 닿을 수 있는 곳에 그 사람의 집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 발만 잘못 디디면 얼음장 밑으로 가라앉을 것 같은 위기를 잠시 유예시킨 건 하운이었다.

“하얀 울타리에 빨간 장미 넝쿨이 늘어지고 상추와 오이와 토마토가 무럭무럭 자라는 마당, 휴일이면 호미와 가위를 들고 정원을 가꾸며 나를 기다려 주는 사람이었으면 해요. 내가 끓인 찌개를 호호 불며 냄비째 들고 가면 주방에 들어가 서둘러 잡곡밥을 밥솥에 안치는 사람.

그는 마당에서 딴 풋고추와 호박 잎사귀에 쌈장을 만들어 상을 차리고, 나는 토마토와 상추를 솎아 샐러드를 만들죠. 함께 차린 소박하고 풍성한 저녁 식탁. 나는 꿀같이 밥을 먹을 거예요. 고추가 매워서 재채기를 하면 밥풀 튀었어, 하고 웃어주는 사람, 그런 다음 괜찮아? 하고 나를 염려해 주는 사람.

루빈스타인이 연주하는 쇼팽의 녹턴 스물일곱 곡을 모두 틀어 주는 동안 나는 별을 보고 누워 저 별은 나의 별, 이 별도 나의 별, 한껏 욕심쟁이가 될 거예요. 그가 말해 주는 별의 전설. 나는 병아리처럼 그 사람의 겨드랑이 밑으로 얼굴을 파묻겠지요.

그의 땀내가 나를 자극하고 내가 그의 가슴에 손을 넣으면 그 사람의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요. 전화가 와도 받지 않는 그를 나는 아마 사랑할 거예요. 하지만 우린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겠죠. 대신 이런 말을 할 거예요. 칼 세이건을 읽었어. 별의 시작과 끝과 우주의 팽창에 대한 이 부분이 아주 마음에 들어. 그가 책을 펼치고 나를 위해 밑줄 그어 놓은 부분을 소리 내어 읽어 주면 나는 눈을 감고 우주를 상상할 거예요.

그는 책을 덮고 내 이마에 돋기 시작한 흰머리를 세어 주겠죠. 한 가닥에 백 원만 받아도 부자가 되겠다고, 내 눈가에 깊이 자리 잡기 시작한 주름과 지방이 늘어난 뱃살까지 놀리면, 나는 새치름하게 눈을 흘기고 몸을 가리겠죠. 그는 낄낄 웃으며 마음은 여전히 스무 살인 나를 그래도 귀엽다고 해 줄 거예요.”

눈을 감은 채 미소 짓는 그녀는 아름다웠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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