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39] 숙달된 조교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연재소설

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2-07 06:30:27

희숙은 자신의 느려 터진 움직임을 성가심으로 여기지 않는 동료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룸메이트 문동이가 잘 챙겨 주긴 해도 부서가 달랐고 직원만 500명인 공장에서 자신에게 우호적인 동료에 다가가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희숙은 말은 줄이고 솔선수범하는 영역을 넓혀 나갔다. 동료들의 일을 도왔고 잔업이 끝나면 얼른 숙소로 돌아가 저녁을 준비했는데 동이가 좋아하는 반찬 위주였다. 희숙은 숙소 사람들에게 인기였다. 손이 크고 넉넉한 인심 때문이었다.

또 동이를 따라 중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하겠다는 동료들에게 고시 준비 상담을 해 주기도 하고 먼저 검정고시 본 사람으로서 문제 풀이 요령을 도와주겠다고 자청했다. 신임을 얻기 위해 완벽하게 그들에 동화되는 작전은 차츰 열매를 맺고 있었다.

희숙은 야근이 끝난 뒤, 늦은 저녁을 준비하러 부엌에 들어갔다. 동이는 희숙의 손에 전단지 한 장이 쥐어진 것을 보았다. 곤로에 불을 붙이러 성냥을 찾고 있는데 동이가 희숙이 손에 든 것이 무어냐고 물었다. 희숙은 숙소 앞에서 주웠다며 곤로에 불붙일 때 쓰려고 가져왔다며 돌돌 말아 쥐고 있던 전단지를 펼쳐 봤다.

“아까 자세히 못 보고 주웠는데 뭐라고 쓴 거지?” 검정색 바탕에 흰 글씨로 해고자 복직·임금인상·처우 개선·악덕 기업주 퇴진 등이 쓰여 있었다. 동이는 혼잣말을 했다.

“해고된 사람을 무슨 수로 복직시키냐, 그라고 짤린 사람들이 회사 앞에서 농성하고 작업 방해하믄 다 경찰에서 연행해 뚜드려 팬다는디?”

희숙은 동이 손에 들려진 전단지를 빼앗아 불을 붙이며 말했다. “그거 못 하게 노조 만드는 거라던데예. 우리 권리 지킬라꼬. 닭이 울어야 알을 낳든지 말든지 할 거 아인교?”

주말 저녁엔 동이의 검정고시 수학을 가르쳤다. 동이의 검정고시 문제집은 거의 저학년 산수 수준이었다. 그래도 쉽게 푸는 모습을 보이면 의심할 수도 있기에 몇 개 정도는 모르겠다고 연기했다. 생각 안 나는 척, 어려운 척, 하다가 풀기도 하고 모르는 문제는 동생한테 물어봐서 알려 주겠다고 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에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그럴 때마다 동이는 답안지와 맞춰 보곤 신대륙을 발견한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손바닥을 치며 좋아했다. 희숙이 동이가 검정고시에 합격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일이 수월해질 게 분명했다. 검정고시 시험 날짜가 정해지자 희숙은 동이의 잔업을 대신하겠다며 시험 준비에 집중하라고 배려했다. 아침·저녁밥도 희숙이 준비했다. 동이는 합격하면 자기가 큰맘 먹고 고기를 사 주겠노라 약속했다.

동이는 검정고시 치르는 날 맞선 보는 사람처럼 긴장했다. “시방 나 떠는 거 보이제? 머리가 나빠서 공부한 거 기억나려나 모르겠네잉. 흰색은 종이요, 검은색은 잉크. 그동안 머리에 집어넣은 거 하나도 기억 안 나믄 나가 국졸로 평생 살아야지 다신 시험공부 안 한당게”

동이는 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검정고시에 합격한 기념으로 고향 부모와 동생들에게 줄 옷을 장만하기 위해 희숙을 데리고 청계천 6가로 향했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박선경 필진페이지 +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