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38] 포섭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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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2-06 06:30:31

“나, 얼마 전에 검정고시 봐서 중학교 졸업했다 아입니꺼. 제 동생이 부산에서 수학 천재라예, 그래서 지도 수학은 조금 하지예. 혹시 모르는 거 있으면 가르쳐 줘도 될까예? 마, 알아서 잘 하시겠지만.”

동이의 작은 눈이 커졌다. 구세주 만난 표정이었다. 방 안에서 폴작폴작 뛰었다. 오메 오메 오메, 참말이랑가? 나가 국민핵교 댕길 때도 산수를 모대가지고 대글빡 나쁘다고 울 엄니헌티 매일 등짝 맞았는디 오메, 인자, 살긋네. 희숙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렇게 잘 풀릴 일이냐.

희숙과 동이는 부서가 달랐다. 희숙은 조립했고 동이는 부품 분류와 포장까지 했다. 동이와 부서가 달라 공장에서 대화할 기회는 없었지만 일을 마친 후 숙소로 돌아오면 동이는 하루 일과를 보고하듯 떠들었다. 동이는 회사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시비에 대해서, 희숙은 노조 설립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떠봤다.

처음 노조 얘기가 나왔을 때 동이는 노조가 설립되면 근로자에게 무슨 이득이 있는지 물었다. 궁금해서 물어본 게 아니었다. 동이는 옆 사업장에서 위장 취업자가 선동해 위장 취업자에게 휘둘린 근로자까지 해고당한 얘기를 전하며 괜히 노조니 어쩌니 만들다 해고라도 당하면 어쩌냐며 겁을 먹었다.

공장 내 근로자들 분위기는 노조 설립에 부정적이었다. ‘일월’에서 벌어진 일은 아니었지만 주변 공장에서 노동자 권리니 복지니 주장하다 쫓겨난 노동자들의 절박한 상황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지난해 신규 노조가 200개 넘게 생겼다 해도 신규 노조들은 정부나 사업주가 주는 불이익과 또 싸워야 했다. 불안전한 노조는 와해되거나, 있어도 제 기능을 못 했다. 두려움이나 불안은 전염성이 강했다. 해고당한 노동자들이 피켓을 들고 공장 앞에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을 지나다 보면 해고 노동자들에 대한 측은함과 회사에 대한 반발심이 생기기보다는 권리를 포기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고당하면 당장 입에 풀칠할 대안이 없다는 게 약자들의 공포였다. 노조가 생겨 사업주들을 압박해 노동자 권익이 향상되면 좋겠지만 자칫 잘못해 일자리를 잃게 된다면 그보다 무모한 시도는 없을 터였다.

동이도 마찬가지였다. 아침부터 야근까지 일해 번 돈은 고스란히 고향 부모 댁으로 보내졌다. 동이 한 달 월급은 고향집 여섯 식구의 과거·현재·미래였다. 공장에서 일하는 동이의 권익보다 중요한 게 고향 식구들의 하루 먹거리였다. 인간답게 사는 건 배고픔을 해결한 뒤의 일이었다. 아무리 희숙이 일을 빨리 배운다 해도 수십 년 여공들의 구력을 쫓아가기엔 턱없이 느린 손놀림이었다.

희숙은 구리 포일을 감싼 피복을 파란색과 빨간색·검정색으로 분리한 후 다시 얇고 작은 하얀 플라스틱 통 안으로 집어넣는 작업을 했는데 세 개의 전선은 흰색 통 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희숙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숙련된 여공들이 1분에 스무 개를 하는 동안 희숙은 겨우 두 개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도 초보 근로자의 미숙함을 탓하거나 눈치 주는 사람은 없었다. 단순노동인 만큼 시간이 해결할 문제였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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