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16]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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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2-31 06:30:10

같은 대학 출신인가. 나를 어떻게 알지? 승연은 대학 때나 지금이나 사진 찍는 걸 귀찮아했다. 요즘처럼 휴대폰으로 마구 찍어 맘에 드는 사진만 골라낸 후 필요 없는 사진은 삭제하는, 그런 시절이 아니었다. 필름을 갈아 끼우고 암실에서 인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피사체의 모습이 드러났다. 승연은 앨범을 뒤지며 투덜거렸다.

‘이게 다 짐인데 언제 처분하지?’

수십 년 전 사진첩에서 현재의 승준 엄마 얼굴을 찾아내긴 쉽지 않았다. 게다가 빛바랜 사진 속 인물들은 묵혀 둔 세월만큼이나 승연의 기억 속에서 게으르게 잠영하고 있었다. 승연은 앨범을 넘기다가 한 사진에 눈을 고정했다. 바다를 배경으로 여러 명이 단체로 찍은 사진이었다. 마치 수세기 동안 봉인되어 있던 고대 왕족의 무덤 속 비밀 상자를 발견하고 조심스레 다가가듯 승연은 사진첩 셀로판지를 벗겨 꺼낸 사진을 가까이서 봤다. 손가락으로 수를 세었다. 서른둘. 그중 여자는 여덟 명이었다.

얘는 누구더라. 승연 어깨에 팔을 걸친 기순이 옆에 고개를 왼쪽으로 반쯤 돌린 여자가 입을 벌려 웃고 있었다. 흰색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기억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남자들 사이로 듬성듬성 여자들이 끼어 있었다. 기순과 승연, 또 한 명의 여자가 나란히 붙어있었을 뿐이다. 승연은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사진을 확대하려 했다. ‘아 참, 이거 디지털이 아니지’

승연은 습관적으로 사진을 펼치려는 행동이 웃겼는지 혼잣말까지 하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그녀가 누군지 기억나지 않았다. 승연은 사진을 잠시 내려놓고 앨범을 뒤졌다. 혹시 다른 사진이 있을지도 몰라. 같은 날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이 나왔다. 넉 장뿐이었다. 성냥갑을 쌓아 놓은 것처럼 보이는 네모반듯한 건물에 ○○콘도라는 간판이 걸려 있는 사진이 보였다. 승연은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분명히 화가 난 표정이었다. 승연은 자세히 보려는 마음에 이번엔 사진을 멀찌감치 놓고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맞아, 아침부터 단체 사진 찍는다 해서 내가 짜증 냈었지. 무슨 단체 사진을 아침 댓바람부터 찍냐고. 여자들은 세수하기 전이라 안 찍는다고 난리였는데….’

승연은 건물 입구에 있는 해태상을 보니 그날 아침에 있었던 해프닝이 떠올랐다. 누군가 아침 먹기 전부터 사진부터 찍자고 조르는 바람에 세수 안 한 상태로 모자 눌러쓴 모습이었다. 바닷가 앞에서 찍은 단체 사진보다 인원이 적었다. 남학생들은 새벽까지 술 마시느라 일어나지 못했고 몇몇 부지런한 학생들만 모여 찍은 기억이 떠올랐다. 거기에도 승준 엄마 얼굴은 없었다. 승연은 다른 사진을 꺼냈다. 모닥불 주위로 빙 둘러앉은 채 기타를 든 남학생이 두 손을 번쩍 들고 남학생들 사이에서 얼굴을 마주 보며 웃고 있는 기순이와 승연의 모습이 보였다. 마지막 한 장은 회색 구름이 바다 주위를 감싸고 있는 가운데 승연이 서 있는 장면이었다. 혹시 그날인가. 고대 왕족 무덤에 봉인된 비밀 상자처럼 영원히 잠재우기로 했던 그날.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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