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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본다. 머리에 핵을 이고 살며 밖으로는 자국 중심주의의 물결이 살벌한 칼춤을 추는 가운데 국가안보와 경제에 집중해야 할 이때 난장판이 된 정치 상황에 모두가 넋을 놓고 있지 않은가.
북한보다도 가난했던 시절을 이기고 전 세계 국력 순위 6위의 부강한 나라를 만든 우리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이 혼란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를 살피다 보면 그 꼭짓점에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좌파 세력의 득세와 한반도와 세계의 안위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는 북한 핵 개발의 출발점이 김대중 정권임을 고발한 전 국정원 직원의 기록… 이 절박한 시점에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편집자 주]
‘사상계’와 결별하고 다시 부산으로
봉천동 국사봉 꼭대기에 살던 1990년대 초, 나는 애물단지가 된 ‘사상계’를 집 옆의 공터로 모두 가지고 나가서 불태웠다. 이를테면 ‘이념의 화형식’을 거행한 셈이었다. 불타는 책을 보면서 ‘이제 이념과는 결별이다’고 다짐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사상계를 다 없앤 게 조금은 후회가 되기도 한다. 그 잡지는 말하자면 큰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우리 집의 가보(家寶)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의 청년 시절은 사상계로 시작해 사상계로 끝났다.
다시 재수 시절의 얘기로 돌아가자.
3개월 앞두고 시작한 대입 준비… 서울대 법대 합격
여름이 지나고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조금 선선해지자 나는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불현듯 ‘아무래도 대학에는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다가 그야말로 인생의 낙오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에 부랴부랴 짐을 싸 들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감만동에 살던 누나 집에 우선 여장을 풀었다.
다시 학원으로 돌아가자니 자존심도 상하고 이미 진도도 맞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독서실에서 혼자 공부했다. 시험까지는 3개월 정도 시간이 있었다. 그야말로 미친 듯이 공부했다. 특히 수학은 문제 유형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당시에 안성탕면이 처음 나왔는데, 독서실에서 끓여 먹었던 그 라면 맛은 잊을 수 없다. 이렇게 치른 1983학년도 입시에서는 점수가 그런대로 잘 나와 서울대 법과대학에 응시해서 무난하게 합격할 수 있었다.
떠올리면 가슴 먹먹해지는 촌놈의 대학 생활
이렇게 해서 고대하던 대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의 대학 시절을 얘기하자면 언제나 가슴이 먹먹해진다. 다시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을 들추어내는 느낌이다. 나는 처음부터 대학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나 같은 촌놈에게는 대학이라는 곳이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이방(異邦)이었다. 젊음이고 낭만이고 뭐 그런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런 건 나에게 사치일 뿐이었다. 이런 곳에 들어오려고 그렇게 고생했나 싶었다.
내가 입학한 1984년에 학원자유화조치라는 게 시행되었다. 군사정권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했던지 기만적인 유화정책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마침 80년도 초에 ‘녹화사업’에 끌려갔던 선배들이 속속 복학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녹화사업이란 전두환 정권이 문제 학생들을 강제로 군에 입대시킨 정책을 말한다.
이러한 정황과 맞물려 학생운동이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고 있었다. 학도호국단이 폐지되고 총학생회가 재조직되었다.
백바지의 블랙 코미디언으로 변한 유시민 선배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자 도서관 앞 아크로 광장에는 거의 매일 수천 명의 학생이 모여서 데모를 했다. 날이면 날마다 캠퍼스 내에 최루탄과 지랄탄이 난무하고 학생회관 주변에는 언제나 대자보가 빽빽이 나붙었다.
그 시절에는 복학생협의회 대표이던 유시민 선배가 대자보를 붙이는 날이면 넋을 잃고 쳐다보곤 했다. 물론 대자보는 작성자를 밝히지 않았지만 대강 작성자를 알 수 있는 분위기였다. 그때엔 그가 글을 참 쫄깃하게 잘 썼다.
아마도 1987년인가로 기억되는데, 그가 학원 폭력 사태로 구속되고 난 후 쓴 항소이유서는 많은 이에게 감동을 준 명문장이었다. 자신이 어떻게 해서 운동가가 되었는지에 대해 어찌도 그리 설득력 있게 설명했던지, 그 글을 읽은 판사도 감동했다고 한다. 그때에 비하면 요즘의 그는 많이 망가진 듯하다. 언젠가 그가 백바지를 입고 국회에 출현했을 때는 마치 흰옷 입은 블랙 코미디언을 보는 것 같아서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념 서적이 대유행이던 시절
당시 학생들 사이에선 사회과학 서적을 섭렵하는 게 일종의 유행이었다. 법과대학에서는 고시 공부한답시고 법서(法書)라도 끼고 다니면 팔불출로 취급되는 분위기였다. 각 동아리들에서 수준에 따라 읽어야 하는 필독서들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수업에 빠지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고, 혼자 이념 서적을 탐독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고 별 재미도 없고 인생에 도움도 안 되는 책들이지만 그때엔 꽤나 진지하게 읽었다. 초기에는 여러 사람이 쓴 ‘해방 전후사의 인식’에서 시작해 이영희 교수가 쓴 ‘전환 시대의 논리’ ‘베트남 전쟁사’ ‘우상과 이성’ 같은 여러 권의 책을 읽었다. 벌거벗은 베트남 여자애가 네이팜탄을 피해 달아나는 그림이 실린 책 표지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도 읽었다. ‘죽음을 넘어…’ 어쩌고 하는 황석영 씨가 쓴 광주사태 관련 책도 읽었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선 이런 책들을 읽는 것이 무슨 코스처럼 되어 있었다.
세계 혁명사에 심취하며 고수 좌익의 길로
그즈음 나는 특히나 세계의 혁명사에 깊이 빠져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러시아 공산혁명을 거쳐 중국 공산화와 베트남 전쟁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모든 혁명사에 관련된 기록을 가리지 않고 두루 섭렵했다. 물론 혁명가들에 대한 전기물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카를 마르크스‧블라디미르 레닌‧레온 트로츠키는 물론이고 안토니오 그람시‧로자 룩셈부르크‧체 게바라‧무아마르 알 카다피 등의 전기도 읽었다.
한길사에서 펴낸 20권짜리 ‘함석헌 전집’도 거의 다 읽었다. 물론 사상계를 통해 이미 함석헌이 쓴 글들을 단편적으로 접한 적이 있지만 전집으로 읽으니 새롭고 깊은 맛이 있었다. 함석헌의 호쾌하고 자유분방한 사고에 한동안 매료되었다. 그러면서 나의 사고는 급속히 좌편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흔히 말하는 ‘골수 좌익’이 된 것이다.
중국혁명에 매료돼 중국어 공부도
나는 특히 중국혁명에 빠졌다. 앞서 언급한 ‘홍위병’이란 책의 영향이 컸다. 중국혁명에 매료된 나는 중국어를 수강 신청해 나름대로 꽤 열심히 공부했다. 그래서 ‘인민일보’를 읽을 수 있는 수준까지 되었다. 중국과 관련된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구해 읽었다. 당시에는 중국 관련 서적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청계천을 돌아다니며 하루종일 발품을 팔아야 겨우 관련 서적을 몇 권 건질까 말까 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에 사회주의 서적에 대한 판금이 풀리면서 중국 관련 책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The Red Star Over China)’이나 아그네스 스메들리의 ‘위대한 길-한 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다(The Great Road)’ 등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사서 읽었다.
에드거 스노는 아내인 님 웨일스(본명은 헬렌 포스터 스노)와 함께 1930년대 말 국민당의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 중국 내륙 깊숙이 연안까지 들어가 중국공산당 혁명가들을 만났다. ‘중국의 붉은 별’은 스노의 그런 생생한 체험을 기록한 책이다. 후에 모택동은 스노를 ‘평생의 친구’라며 높이 평가했다.
스노의 아내인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은 당시 연안에 있던 김산(본명 장지락)이라는 한국 혁명가의 일대기였는데, 이 책은 1980년대 대학가에서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나도 ‘아리랑’을 읽은 후 한동안 ‘직업 혁명가’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혔다. 덩달아 나의 고향 출신 혁명가였던 약산 김원봉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김기삼 변호사의 블로그(https://niswhistleblower.tistory.com/)를 방문하면 좀 더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정리= 박혜수 편집위원
프로필
김기삼
△서울대 법대 졸업
△펜 스테이트 디킨슨 법대 비교법학(LLM) 석사 졸업
△국가정보원 8년 근무
△2003년 미국 망명
△2011년 망명 확정
△(현) 미국 뉴욕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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