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는 퇴근 후 친구의 집요한 꾐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가며 신림동에 위치한 작은 ‘어묵집’으로 발걸음을 뗐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진한 추억의 내음이 느껴졌다. 내부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소주 잔을 기울이며 시끌벅적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진은 신림동 ‘오뎅집 모이’ 내부 전경 ⓒ스카이데일리
“아 오늘도 그 인간이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늦은 퇴근길. 지친 걸음으로 집을 향하던 기자에게 친구의 전화가 걸려왔다. 직장 상사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으며 이대로 집에 가긴 싫으니 술 한 잔 하자고 칭얼대는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마침 잘 아는 어묵집이 있으니 우리 한 번 ‘인생’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해보자는 친구의 집요한 꾐에 기자는 못이기는 척 넘어가고 말았다.
북적대는 소음 사이로 웃음소리, 격앙된 말들이 오고가는 퇴근길 번화가. 삼삼오오 무리를 이룬 직장인들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여럿 눈에 띤다. 내일 당장 출근해야한다는 부담감을 떠안고 있지만 집으로 바로 가기엔 아쉬운 마음에 기자 역시 행렬에 동참했다.
기자는 신림동에 위치한 중소규모 ‘어묵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진한 수증기가 느껴졌고 내부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매장 내부 한 쪽에는 원목으로 된 원형 테이블과 의자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 맞은 편에는 어묵꼬치들이 수북이 담긴 ‘오뎅바’ 테이블이 놓여 있다. 어묵을 양껏 먹어보리라는 의지에 찬 기자는 친구와 함께 오뎅바 테이블로 향했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겨우 한 자리씩 엉덩이를 붙일 수 있었다.
추운 겨울에 어울리는 따끈한 어묵과 국물은 먹기도 전에 이미 차가운 손과 마음을 녹였다. 치즈, 오징어, 고추, 맛살, 곤약, 떡 등 어묵 종류는 무척 다양했고 이를 바라보는 마음 한 켠에는 이미 흡족함이 감돌았다.
소주 한잔과 함께 어묵을 입에 담았다. “크~” 시원한 소주 한 잔과 따끈한 어묵의 조화로운 맛이 고단했던 하루 일과를 씻겨줄 만큼 입안을 강렬하게 맴돌았다. ‘이 맛에 술 한 잔 걸치는 거지’ 내일 다시 회사에 나가야 한다는 부담감을 잊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한 잔, 두 잔 걸치다 보니 어느새 소주 세 병을 마셨고 술기운이 볼 끝에 달아올랐다. 누군가 인생이 쓰면 소주가 달다고 그랬던가. 이날 소주는 유독 달았다. 친구는 “술이 달다는 소리는 어른들 입에서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술톡(talk) 바람…음주로 쌓는 진솔하고 씁쓸한 우리네 이야기
▲ “크~” 시원한 소주 한 잔과 따끈한 어묵을 차례로 입에 넣었다. 입안을 강렬하게 맴도는 술맛은 내일 출근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잊게 할 정도로 좋았다. 한 잔, 두 잔 걸치다 보니 어느새 소주병이 쌓여갔다. 술기운이 볼 끝에 달아올랐다. ⓒ스카이데일리
친구는 술이 마음을 가득 채우자 숨겨놨던 이야기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 맨날 야근해. 정시 퇴근? 그런 게 어딨어. 하루하루 눈치보기 바쁜거지. 상사가 일을 주는데, 야근을 안하면 도저히 끝낼 수 없어. 난 그걸 받기만 할 뿐, 쳐낼 수가 없다” 어느새 친구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잘하고 싶은데 진짜 뭘 해도 안돼. 열심히 해도 아무것도 안한 게 돼버려. 긍정적으로 마음을 고쳐먹어보지만, 힘에 부치네. 난 어딜 가야 환영받는 존재가 될까. 요즘은 내 존재가 무의미하다는 생각까지 들어”
조곤조곤 가슴속에 담아둔 얘기들을 풀어놓기 시작한 친구의 하소연에 기자는 어떤 말로 위로해주면 좋을지 막막해져 아무 말도 건넬 수가 없었다.
문득 둘러본 공간 속에는 다양한 표정을 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우는 사람, 웃는 사람,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사람, 지친 얼굴로 술 한잔 털어내는 사람, 애써 웃음 짓지만 지친 표정을 감출 수 없는 사람 등. 다들 사연 하나쯤은 안고 있을 터였다.
맞은편에는 세 명의 남녀 일행이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고 있었는데 어느새 기자와 친구는 이들의 이야기에 동참했다. 발단은 우리가 마시던 술병을 앞의 일행이 가져가면서 부터다. 기자의 친구가 “어, 그거 우리 건데”라고 말하자 앞 쪽 사람들은 꺄르르 웃으며 “어머머, 미안해요. 우리 건줄 알고”라고 대답한 이후 이야기 보따리를 나누기 시작했다.
일행 중 한 여성은 자신을 간호사라고 소개했다. 그는 자신이 다니고 있는 병원에서 느끼는 서러움을 털어놨다. “바로 직속 상사가 있는데 절 너무 마음에 안 들어 해서 속상해요.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매일 회사 가는게 지옥 같아요”라고 읊조리던 그는 결국 막바지에 눈물까지 쏟아냈다.
함께 듣던 일행 중 다른 여성이 “관두면 안 되냐”고 묻자 “누구는 다니고 싶어서 다니나. 당장 관두면 다음 달 카드 값은 누가 내고”라며 탄식어린 말을 했다. 이에 기자의 친구는 “하긴. 맞아요. 이달에 쓰는 돈은 다음 달 내가 내주는 거죠”라고 말해 한바탕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잠깐 유쾌해진 것도 잠시. 회사를 그만두라고 다그쳤던 다른 여성도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사실 나도 마찬가지에요. 난 내일이 오는 게 그렇게 싫어요. 내일도 오늘처럼 살 생각을 하면 마음이 답답해져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일을 기대하면서 살고 싶어요”라고 말하며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일행 중 남성은 “우리 퇴근했는데 슬픈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면서 회사에서 있었던 웃긴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 술의 힘을 빌려 모르는 사람들과 합석을 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서로서로 술 한 잔과 함께 힘든 일들을 아낌없이 털어놓았다. 문득 내일은 오늘보다 더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은 '오뎅바'의 모습 ⓒ스카이데일리
그는 “한 번은 회의 때 계속 혼만 나 끝이 없는 우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끼고 있는데, 휴대폰에 있는 SIRI(음성인식 기능)를 잘못 불렀다”며 “혼내 던 상사의 말에 SIRI가 ‘죄송합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해 일순간 빵 터졌다”고 말해 일행 모두가 박장대소했다.
함께 한바탕 웃고나니 긴 시간 나눴던 슬픈 얘기가 술 한 잔과 함께 꿀꺽 삼켜졌다. 술 한 잔과 웃음 한 자락의 마법이었다. 퇴근길 직장인들이 ‘술 한 잔’을 찾는 까닭은 헛헛한 마음 부여잡고 내일 하루를 또 다시 살아가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꾸민 모습보단 날 것 그대로…진솔한 ‘음주’ 토크쇼 인기
최근 tvn에서 방영 중인 ‘인생술집’은 기존 토크쇼와 달리 ‘술방’으로 인기를 끌고있다. 술방은 실제로 술을 마시면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는 방송 포맷 가운데 하나로 유명 연예인들이 출연해 술을 마시면서 진지하면서도 씁쓸한 그러나 웃음이 있는 인생 이야기를 나눈다.
방송을 보면 실제로 술의 힘은 생각보다 크다. 그동안 이미지 관리를 숱하게 해왔던 배우들도 술 앞에서는 어느 정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낸다. 선조들이 즐겼던 진정한 ‘음주가무’까지 서슴없이 등장한다.
기자도 마찬가지다. 술의 힘을 빌리면 아무에게도 못했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솟는다. 오늘 겪었던 모든 힘든 일들도 술 한 잔으로 꿀꺽 삼켜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내 “내일을 다시 살아볼까”하는 오기도 생겨난다.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밤 10시를 조금 넘긴 시각. 얼큰하게 취한 직장인들의 인파에 섞여 3호선 압구정역을 지나자 타고 있던 지하철에서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퇴근길, 집으로 돌아가는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하루하루 살아내기가 참 녹록치 않지만 우리 모두 시간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나란히 걷는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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