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 View] 진화하는 대출사기와 우리은행의 공염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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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준 금융부장·부국장대우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6-19 00:02:40

대출사기는 날이 갈수록 진화한다. 금융감독원은 대출사기를 예방하려면 은행에 대출 가능 여부를 확인하라고 충고한다. 사기꾼은 다급한 피해자 사정을 악용하므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믿을 만한 제도권 금융기관을 이용하란 뜻이다. 그러나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도 나지 않을 것 같은 은행원조차 감쪽같이 속이는 고도화된 대출사기 전략에 대해선 알려진 게 거의 없다. 대출사기꾼은 어떻게 은행원을 속일까.

2017년 3월 개봉한 영화 ‘원라인’에서 대학생 주인공은 깜짝 놀란다. “우리 같은 학생도 신용대출이 가능하네!” 사기계의 샛별이 된 민 대리의 비결은 단순했다. 은행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신용과 담보 관련 서류를 조작한 것이다. 같은 수법이더라도 민 대리는 성공했지만 송 차장은 실패했다. 서류 조작만으론 부족했다. 민 대리는 여성 은행원을 홀리는 말과 남성 은행원의 시선을 잡는 미인계로 직장인 신용대출 사기를 성공시켰다. 영화로 알게 된 대출사기 수법은 현실에서도 통할까.

놀랍게도 민 대리와 같은 사기꾼은 현실에도 있다. 무자격 대출자를 모으고 서류를 위조해서 서민금융상품을 허위 대출하는 것까지 같았다. 사기꾼들은 2019년 7월부터 상환 능력이 없는 실업자를 모았다. 이들은 사진을 수정하는 컴퓨터 프로그램 포토샵으로 건강보험 서류를 조작해서 급여 소득이 있는 것처럼 은행을 속였다. 신용이 낮은 직장인에게 정부 보증을 통해 저금리로 돈을 빌려주는 햇살론은 사기꾼에게 먹잇감이었다. 사기꾼들은 대출사기 261건을 통해서 대출금 30억5400만 원을 가로챘고 실업자들은 대출사기를 돕는 조건으로 대출금의 30%를 받았다.

뛰는 정부 위에 나는 사기꾼이었다. 정부가 각종 서민전용 대출 상품을 만들면 사기꾼은 상품별 특징을 분석하고 직접 대출까지 받는다. 사기꾼은 수시로 은행에서 대출 상담도 받는다. 은행원의 예상 질문을 꿰뚫고 성격과 성향까지 파악한다. 영화 속에서 민 대리는 대출상담하던 여성 은행원에게 미인이라고 칭찬한다. 여성 은행원이 “아닌데”라고 대답하면 민 대리는 뚫어지게 쳐다본다. “완벽하다. 부모님께 감사하다고 생각하셔야겠네!” 손자병법에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했는데 대출사기꾼이야말로 전략의 귀재다. 정부 재원으로 보증하는 서민대출이 대출사기꾼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대출사기 수법은 영화를 통해 진화한다. 사람들은 대출사기 관련 기사를 읽으며 혀를 차지만 사기꾼은 기사를 통해 범죄 수법을 탐구한다. 커뮤니케이션 연구의 선구자인 미국 학자 해럴드 라스웰이 설명한 것처럼 대중매체는 대출사기 보도로 사회(환경)를 감시하고 대출사기 영화로 정보와 오락을 전수한다. 영화 ‘원라인’을 만든 양경모 감독도 언론을 통해 대출사기를 알았고 직접 대출 브로커를 취재하면서 시나리오를 썼다. 치열한 취재로 탄생한 기사와 영화가 범죄를 위한 교육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악용될 수도 있는 셈이다. 어찌 됐든 경찰은 대출사기꾼을 잡느라 분주하다.

최근엔 은행원을 속일 필요가 없는 대출사기가 등장했다. 은행원이 직접 대출사기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연거푸 은행원 횡령사건에 연루된 우리은행은 초상집 분위기다. 우리은행 기업개선부 A 차장은 2022년 4월 체포됐다. 은행원의 횡령 금액이 700억 원대라는 사실도 놀랍지만 우리은행이 6년 이상 횡령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여론의 질타를 받았던 우리은행은 당시 재발 방지를 약속하면서 내부통제 강화를 외쳤다. 우리금융지주 임종룡 회장은 지난해 취임하면서 “시장 신뢰를 잃으면 순식간에 은행도 문을 닫을 수 있다”면서 “빈틈없는 내부통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우리은행의 윤리경영 선포는 공염불이었다. 차장이 2년 전에 700억 원대 횡령을 저질렀다면 대리가 올해 100억 원대 횡령을 저질렀다. 김해서부경찰서는 13일 대출사기 혐의로 30대 은행원 B대리를 구속했다. 김해지점 기업대출 담당이었던 B대리는 올해 초부터 고객 명의로 대출신청서와 입금 서류를 조작해서 약 100억 원을 횡령했다. 임종룡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내부통제 체계도 그룹 내 사각지대가 없도록 업그레이드하고 윤리․준법의식 강화와 금융소비자 권익 제고에도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회장이 내부통제를 외칠 때 대리는 고객 돈을 훔쳐서 가상화폐에 투자했다.

우리은행 횡령사건이 터지자 강력한 규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시민단체인 금융정의연대는 최고책임자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하다고 주장했다. 되풀이되는 횡령 사고를 막으려면 내부통제 소홀에 대한 책임을 임종룡 회장이나 조병규 행장에게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좌제를 떠올리게 하는 주장이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적지 않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듯 내부통제가 허술한 은행에 돈을 맡겼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고객의 신뢰를 먹고사는 우리은행이 언제쯤 고양이를 없앨 수 있을까?

이상준 금융부장·부국장대우 jun@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