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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러스트 미 재단 본부를 한국에 건설할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건물과 가장 깊은 지하도시가 동시에 계획·설계·완공되었다. 그러나 빛과 그림자처럼, 지하 어비스수의 존재는 일반인에게는 철저히 감추어졌다.
세계 최고의 첨단 과학 기술진은 잠망경과 같은 원리로 태양을 따라 움직이도록 설계된 장치를 이용해 태양열과 햇빛을 성공적으로 지하에 공급하고 있었다. 건물의 황금빛 반사유리가 외장 재료로 사용된 것도 그러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 중 하나였다.
스카이라운지의 야경이나 도시의 풍경, 첫날 하운의 방에서 내려다보이던 구름은 모두 정교하게 제작된 3차원 영상이었다. 개인 공간의 전망은 소유자의 취향대로 얼마든지 다채롭게 설정할 수 있었다. 하운의 창밖 풍경 또한 그녀의 선택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인지과학의 응용이에요. 버튼을 누르는 순간 어디로 갈 것인지 생각하게 되면 뇌의 시냅스 회로를 통해 손가락 끝으로 생각이 전달되고 컴퓨터가 인식하는 거지요.”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난밤 내가 앞장서 하운의 방을 찾아갈 수 있었던 건, 단순한 행운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일부터 강무훤 씨 담당자를 바꾸기로 했어요.”
어비수스에 대해 설명을 마친 하운은 붕대가 풀리지 않도록 야무지게 핀을 꽂고 말했다.
“난동을 부렸기 때문입니까?”
내가 물었다. 하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 아침, 식사할 때 결정했어요. 동우를 만나고서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고요.”
구급상자를 정리하고 한쪽으로 밀어 두며 하운이 말했다.
“내 시체는 치우기 싫다는 거군요.”
나는 빈정대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당신은 살 거예요.”
하운의 말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내 죽음이 어디쯤 와 있는지 당신은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요.”
내가 말했다. 하운이 그제야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에게 묻고 싶어요. 먼저 살아야 사랑도 하지 않겠어요?”
내가 억울하다는 듯 물었다.
“언제 죽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보다 내가 먼저 죽을 수도 있어요. 누구나 그래요.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우리는 살아 있고,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의 무게를 감당하면서 안간힘을 다해 살고 있는 거예요.”
“세상의 이치를 훤히 꿰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요. 그래요. 당신은 살았죠. 그래서 그 높은 곳에서 오만하게 날 내려다보며 동정했던 거죠. 죽음과 삶, 그 한가운데서 혼란스러워했다는 이유로 당신은 발 빠르게 나를 버렸어요. 말해 봐요. 나한테 원하는 게 뭐예요. 사랑한다고, 내가 살게 되면 결혼이라도 하자고 말해 주길 바랐던 건가요?”
나는 또 비겁하게 변명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말해야 했다. 그녀가 나를 쏘아보았다.
“하룻밤 잔 남자에게 내 인생을 책임지라고 하는 것 같아요?”
“그럼 내게 왜 이래요? 잔인하잖아요. 난 지금 너무 혼란스러워요. 당신만은 날 이해해 줘야 하는 거잖아요.”
“결혼식장에서 동우를 마주하기 전까지 그 남자를 이해한다고 생각했어요. 더 많이 사랑해 주지 못했다고 후회했어요.”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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