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쓰는 역사 [41] 가을을 장식하는 절개의 꽃 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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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양절은 국화를 감상하며 즐기는 명절

임유이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4-12-15 18:33:52

▲ 동양에서 국화는, 시련에 굴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는 군자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윤상구 사진작가

국화의 가장 큰 특징은 ‘가을에 피는 꽃’이라는 점이다. 기온이 낮아져 거의 모든 식물이 꽃과 잎을 떨구고 혹독한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시기에 국화는 화려한 꽃을 활짝 피운다. 그런 특성 때문에 동양에서는 시련에 굴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는 군자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매화, 난초, 대나무와 함께 ‘사군자’에 포함되는 영예도 얻었다.

국화는 음력 9월9일 중양절(重陽節)을 장식하는 꽃으로도 유명하다. 9는 음양 가운데 양(陽)을 나타내는 홀수 중 가장 큰 수이다. 동양에서는 그 9가 겹친 날을 중양절이라 이름 지어 명절로 지냈다.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의 작품 ‘황후화’는 중양절 즈음을 배경으로 한 중국 영화인데, 장면 중에는 황금빛 의상과 더불어 카펫을 펼친 듯 연회장을 온통 노랗게 뒤덮은 국화꽃들이 인상적이다.

중양절에 국화를 감상하며 국화꽃잎으로 차를 끓이거나 술을 담그고 화전을 부쳐 먹으며 즐기는 오랜 풍습이 있다. 국화술을 따로 만들어 마실 형편이 안 되는 가난한 사람들은 막걸리에 노란 국화를 띄워 마셨다고 한다. 1429년 9월9일 ‘세종실록’에는 “중양절이므로 막걸리를 원로대신에게 내리고 잔치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일본 황실 문장으로 쓰이는 국화

▲ 국화는 음력 9월 9일 중양절을 장식하는 꽃으로도 유명하다. 윤상구 사진작가

국화는 일찌감치 일본으로 전해져 많은 사랑을 받으며 여러 품종으로 개량되었다. 13세기 초 가마쿠라 시대에 고토바 천황은 국화 문양을 황실의 상징으로 삼았고 이후 지금까지도 국화는 관습에 의해서 일본 황실의 문장(紋章)으로 사용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일본의 국화(國花)가 벚꽃이라 알고 있지만 일본에는 공식 국화가 없다. 해마다 봄이 되면 활짝 핀 벚꽃이 사람들을 들뜨게 하고 이는 상업적으로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여권 표지나 국회의원 배지·외교 공관·신사의 휘장 등 나름 권위가 필요한 부분에는 국화 문양이 쓰인다.

미국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가 쓴 ‘국화와 칼’이라는 책은 일본의 특성을 연구한 내용으로 유명하다. 1944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고 있을 때 미국 정부는, 주적인 일본 제국에 대해 너무 무지했으며 전쟁이 끝나더라도 일본을 비롯한 동양에 대한 심층적 이해가 필요하다고 자각하게 되었다.

일본의 특성을 연구한 책 ‘국화와 칼’

일본은 미국이 만났던 적 중 가장 이질적인 모습의 적이었다. 가미카제라 불리는 자살 특공대, 할복 자살을 통한 집단 옥쇄나 대검이나 긴 칼만 들고 무작정 돌격하는 일명 ‘반자이 어택’ 등의 행동을 미국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미국 정부는 적으로서의 일본을 탐색하고 향후 일본의 반응을 예측하기 위해 루스 베네딕트에게 연구를 맡겼다.

특이한 것은, 베네딕트는 일본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상태에서 이 책을 썼다는 점이다. 당시는 전쟁 중이었기에 일본에 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영화·책·미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미국 내 일본 관련 학자 등에 의존하여 일본과 일본인을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베네딕트는 연구 결과 ‘일본인의 행동 패턴’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는데, 이 내용을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다시 정리하여 1946년 책으로 출판하였다.

국화는 평화를 상징하고 칼은 전쟁과 폭력을 상징하는데 일본인은 두 가지 측면을 다 가지고 있다는 뜻에서 ‘국화와 칼’이라는 제목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국화는 예술성, 예절, 충효 등 일본인이 가진 아름다운 면을, 칼은 ‘무(武)’를 중심으로 한 야심과 야욕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그런데 ‘국화’는 일본식 정원으로 나타나는 ‘질서’를 의미하고 ‘칼’은 항상 반짝이게 갈고 닦여 있는 일본인의 내면을 상징한다는 주장도 있다. ‘국화와 칼’이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튼 루스 베네딕트는 메이지 유신과 패전 후의 일본인 등 분야를 다양하고도 세세하게 나눠 심층적으로 연구하였고, 전통적인 일본 관습이나 사회 체계·일본인들의 행동·사고방식·생활 예절·풍습 등을 이 책에서 다뤘다. 또 ‘분수에 맞는 자리 찾기’ ‘과거와 사회에 대한 빚’ ‘명예에 대한 의리’ ‘인정’ ‘자기 수련’ ‘자녀 교육’ 등도 내용으로 포함되어 있다.

오페라 ‘나비 부인’의 원작은 소설 ‘국화 부인’

프랑스 작가이며 해군 장교였던 피에르 로티는 1887년 ‘국화 부인’이라는 소설을 발표하였다. 이 소설은 1885년 자신이 일본에 체류할 때 일본 소녀와 계약 결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된 자전 소설이다. 이 소설과 ‘나비 부인: 일본의 비극’이라는 미국 작가 존 루터 롱의 소설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는 오페라 ‘나비 부인’을 만들어 1904년 무대에 올렸다.

소설 ‘국화 부인’의 주인공 이름은 국화를 뜻하는 키쿠[菊]다. 물론 허구의 세계에 등장하는 일본 여성 이름일 뿐이지만 서양인이 그 많은 꽃 중 국화꽃을 선택한 것은 단순한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피에르 로티도 일본을 떠올릴 때 국화가 가장 먼저 연상되었던 것이 아닐까?

[글 황인희 사진 윤상구]

임유이 기자 lye@skyedaily.com 기자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