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피디와 라라가 매일 같이 퇴근하면서 관계가 미묘하게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남녀 사이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 그들 사이에서 조짐을 보였다.
김 피디가 어느 날 라라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그녀에게 말했다.
“이런 말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사실 나도 집에서 거의 아내 내조를 받지 못하는 남자지. 아내는 직장 다닌다고 아침에 일어나기 바쁘게 자기 준비만 하고 나가니까, 아줌마 올 때까지 내가 아이 먹이고 출근 준비하고 나오거든. 딸이 두 살인데 엄마랑 있는 시간보다 나랑 있는 시간이 더 많아. 아내가 해준 밥이란 건 거의 먹어 본 일이 없지. 내가 왜 결혼했나, 그런 생각 드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야. 결혼이란 건 대체 왜 필요할까 싶기도 하고.”
라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 공개적으로 사귀는 거 어떻게 생각해?”
라라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김 피디 아내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여자의 삶이 어떤 건지 짐작이 가거든요. 나라고 해도 그녀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지 않아요. 동류의 여자끼리 서로 다치게 하는 것은 좋은 일 같지 않아요. 더구나 김 피디는 한창 어린 딸도 있잖아요. 딸을 사랑하고요. 아들은 아빠가 키워도 되지만 딸은 달라요. 여자는 사랑을 먹고 크는 나무예요. 그런 사랑은 친엄마 외엔 해낼 수 없다고 봐요.”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딸, 그렇지. 잠시 잊었어. 내 딸을 많이 사랑해. 엄마가 옆에 있어 주지 못해서 화가 난 건데…… 그렇기는 해도……이대로 계속 가는 건 그럼 무슨 희망이 있지.”
“그냥, 우리 지금처럼 서로의 옆에서 친구처럼 애인처럼 곁에 있어 주는 거 자체로 소중한 인연이 아닐까 해요. 김 피디가 아니었으면 난 그때 버티지 못했을 거고, 김 피디는 일과 육아 사이에서 지친 나머지 아내에게 더 모질게 행동하고 진작 이혼 선언을 했을 수도 있어요. 그런 파국을 막았다고 위로를 삼으면 안 될까요?”
“그래, 모든 만남이 미래를 가질 수는 없겠지.”
김 피디는 다음 개편 때 엠디를 맡겠다고 지원했다. 아이와 시간을 더 보내기 위해서였다. 또 다른 프로그램을 맡으면 라라를 만나기가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은 늘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에 새로 오기로 내정된 최 피디 주변에 몇몇 작가와 리포터들이 다가서고 있었다. 왠지 그 투서의 숨은 작가들처럼 보이는 수상한 풍경이 연상되었다. 그리고 후임자 최 피디와는 한 번의 기획 회의를 끝으로 볼 수 없었다. 세상에 우연은 없는 법.
다음날 약속된 2차 회의 시간을 기다리는데 새 팀원들이 모두 나타나지 않았다. 회의실에 혼자 남겨진 그녀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렇게 그녀에게는 아무런 언질도 없이 최 피디는 작가를 경질했다. 교체하기로 했다거나, 하는 일체 설명이나 변명조차 없었다. 최소한의 예의도 없었다. 처음 대하는 최 피디가 라라에게 그럴만한 이유는 전혀 없었는데도 말이다.
방송국 일을 그만둔 후, 라라는 들어가기 힘들다는 유명 통역대학원에 합격했다. 그러나 라라에게는 모스크바의 구로반점이 기다리고 있었다. 꿈을 펼치기도 전에 접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박기헌 역시 그녀가 다시 모스크바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준호에게 1년간 한시적으로 해보라고 김후원을 설득해 넘긴 식당이 라라를 다시 모스크바로 불러들이는 걸 보고 운명의 아이러니를 느낀다.”
라라의 모스크바행 속에는 기헌과의 이별이 잠재되어 있었다. 기헌은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 서울의 대학에서 강의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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