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비우기’는 다양한 삶을 여행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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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입장, 그의 입장, 다수의 입장 돼 보기
무사유(無思惟)가 중범죄가 될 수 있는 이유

김성수 필진페이지 + 입력 2022-12-30 10:11:16

두 사업가가 치열하게 협상을 하다가 어느 한 쪽이 ‘내가 마음을 비우겠소!’하는 경우가 있다. 그 말은 상대 의중이나 주장에 대한 ‘일부 혹은 전부’의 수용을 의미한다. ‘마음을 비운’ 측은 상대의 주장을 수용하는 것이므로 그간 막혔던 거래의 물꼬를 틔운 발언이 된다.

나를 고집한다는 것은, 물 한 동이를 끌어안고 갈증에 시달리고 있는 주변 사람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내 생각이 맞다’에 아교풀로 붙인 듯 고착된 상태를 말한다. 갑과 을의 거래 관계로 본다면 교착 상태다.

‘내 생각’을 강하게 붙드는 것은 ‘대롱처럼 제한된 시야’와 ‘직진’ ‘거친 표정’ ‘단단함’ 등으로 표현되는 형상을 연상시킨다. 자신의 과녁 외에는 볼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나올 수 있는 태도와 행동을 생리 현상으로 비유한다면 한 줄기 배설물 수준이다. 문제는 그의 사회적 위치나 영향력에 따라서 단순히 악취나 불쾌감을 유발하는 정도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1960년 6월, 아르헨티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1급 전범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비밀경찰에게 체포됐다. 2차 대전 당시 유태인 이주국을 총괄하면서 500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한 혐의였다. 하지만 이스라엘 법정에서 아이히만은 ‘나는 공무원이며 국가가 명령한 행위를 했을 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한다.

유태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그는 우리가 얼마든지 만나볼 수 있는 평범한 이웃 같은 모습”이었다고 기술한다. 만약 그가 히틀러 같은 독재자가 아닌 선량한 군주국의 일원이었다면 그는 근면하게 공무를 보고 명예롭게 은퇴했을 것이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무죄를 주장한 것일까. 아니다. 그녀는 아이히만이 중범죄자라는 사실의 핵심에 ‘무사유(無思惟)’가 있음을 적시했다. 아이히만은 인류 공동의 가치와 대 파멸에 대한 사유를 하지 않은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명령이 아니면 어떤 것도 수용하지 않은 갇힌 시각과 그 관점에만 충실하여 대학살을 자행한 그를 보며 한나 아렌트는 ‘무사유’의 위험성과 잔인성에 대해 경종을 울린다.

세상에 대해 하나의 생각·하나의 관점·하나의 명령 체계로만 집중할 때 어떤 이익이 있을까. 신속·성실·근면·선명성·목표달성·돌파력·추진력 따위가 떠오른다. 명령권자 입장에서는 입안에 침이 고일만큼 충직한 모습이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무사유’를 극형에 처해야 할 유죄라고 주장한 이유는 그 점에 있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권력에 걸맞은 ‘사유의 의무’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사유의 의무’에는 당연히 전쟁 포로의 관점·인류 역사의 관점·생명의 관점·전쟁터에 부모 형제를 보낸 가족의 관점 등등이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아이히만은 ‘유태인은 인류사에서 지워 없애야 할 인종’이라는 자기 배설물 같은 하나의 생각에 푹 잠겨 있었다.

마음을 비운다는 의미는 오늘까지 자신을 살아오게 했던 ‘생각·신념·정보·지식·관념’ 따위를 ‘없는 것 취급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의 포기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두려운 일일 수도 있다. 물구덩이를 채우고 있는 10톤짜리 바위를 거대한 기중기로 꺼내는 일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당신과는 동떨어진 사태인가. 아니다. 당신은 그 10톤짜리 바위더미 같은 ‘생각’을 지금 당장 발견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한 겨울이지만 건강과 물자 절약 차원에서 외출복을 반바지로 하자는 제안이 온다면? 아마도 자신의 ‘생각·신념·정보·지식·관념’들이 순식간에 작동하면서 발작적인 거부 반응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한겨울에 반바지라니, 말도 안 돼!’ 그런데 겨울 패션쇼에서는 이런 일이 예사롭게 벌어지고 있다.

무사유는 자신의 관점이나 신념에 깊이 파묻혀서 뒹굴거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타 존재나 다른 측면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지적 게으름’의 극치다. 게으름은 편하다. 무사유는 ‘마음을 비우는 것에 비해서’ 늘 입고 다니는 셔츠처럼 걸치기만 하면 영육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다.

반면에 마음을 비우는 행위는 낯설고 위험해 보인다. 거래 상황에서는 손실을 각오해야 한다. 인간관계에서는 ‘바보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라는 에고를 텅 비우고 상대방의 ‘생각·관념·지식·가치관·주장’이 들어올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그래야 통하기 때문이다. 물의 흐름이 그렇듯, 바람의 흐름이 그렇듯, 나를 비우면 상대의 아픔에 내 관념이 뒤섞이면서 생명의 물꼬가 트이기 때문이다. 나와 주변의 생명이 활발해지기 때문이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당신 개인 차원에서만 봐도, 다양한 삶을 경험하고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 일이기도 하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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