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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39] 에바 크라우스의 노트
신은 고통을 창조했다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2-28 06:30:10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다가오고 있어서인지 평일인데도 고속버스는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지난밤에도 잠을 자지 못한 탓에 휴게소에서도 내리지 못하고 깜박깜박 졸았다. 터미널에 도착한 버스가 문을 열었다. 승객들이 짐을 챙겨 일어나 버스에서 내렸다.
 
최주결 박사. 강원도 미망리 회귀마을 34번지. 해월영.’
 
나는 메모지를 손에 꼭 움켜쥐고 있었다. 여의도 3번 출구 앞에서 헤어질 때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우리.” 하고 말하던 정하운이 낡은 노트와 함께 내 손에 쥐어 준 메모지였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나는 스마트폰으로 최주결을 검색해 보았다. 같은 이름으로 안과나 의사와 관련된 인물은 없었다. 길 찾기 앱으로 확인한 주소지는 외진 바닷가였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길, 이 모든 게 꿈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코트 주머니에 넣어 둔 노트와 손에 쥔 쪽지가 현실이라는 걸 증명했다.
 
집은 따뜻했다. 난방장치를 끄고 나가는 걸 잊은 덕에 예약 설정 시간마다 보일러가 돌아간 탓이었다. 나는 훌훌 옷을 벗고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깊고 무거운 잠이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른 새벽이었다. 허기로 속이 쓰렸지만 음식을 뱃속으로 밀어 넣을 기분은 아니었다.
 
눈알이 빠질 것 같은 통증이 시작되고 있었다. 맥주 한 캔을 따서 진통제를 욱여넣다가 정하운이 건넨 노트가 생각났다. 거실에 던져 두었던 코트 주머니에서 노트를 꺼내 들고 소파에 앉아 스탠드를 켰다. 붉은색 벨벳 커버를 넘기자 맨 앞 페이지에 책의 제목인 듯, 손 글씨로 쓴 찬란한 상실이란 글자가 눈에 띄었다. ‘에바 크라우스라는 이름이 그 밑에 적혀 있었다. 앞쪽 몇 페이지를 주르륵 넘겨 보았다. 온통 한글로 채워진 노트인데 에바라니, 김씨도 박씨도 이씨도 아니고 크라우스씨라니, 이상한 이름이었다.
 
-신은 고통을 창조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종이는 누렇게 바랬고 텁텁한 먼지 냄새가 났지만 검은 잉크를 채운 만년필로 쓴 글자들은 바로 어제 쓴 것처럼 또렷했다. ‘간호원이나 읍니다처럼 맞춤법 정책에 의한 표기 변화를 제외하고는 띄어쓰기와 표준어 쓰기는 대체로 정확했다.
 
붓글씨의 흘림체처럼 손가락과 팔목의 움직임에 따라 잉크의 강약이 확연히 드러나는 필체는 리듬과 템포를 한눈에 읽을 수 있는 악보와도 같았다. 어느 부분에서는 오래 고뇌한 흔적인 양 잉크가 번져 있었고 또 어느 부분은 쏟아지는 생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펜을 멈추지 않아 잉크가 가늘게 흐려져 있었다. 하지만 한 획 한 획 심연으로 단번에 자맥질해 들어갔음을 증명하듯 에바의 필체는 섬세하면서도 곧았다.
 
-인간은 가면을 만들었다.
우리가 고통조차 사랑한다는 것을 신에게 증명하기 위해.
 
다음 페이지에도 단 두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고통뿐인 삶에 대한 냉소와 조롱 같았지만 그보다는 절망하거나 항복하지 않으리라는 결기가 느껴지는 글이었다. 나는 천천히 다음 장을 넘겼다. ‘무너지지 않는 우주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서문이 시작되고 있었다.
 
- 우주에는 영원만 있을 뿐 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둠과 빛이 있고, 소멸과 생성이 있을 뿐입니다. 시간이란.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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