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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본다. 머리에 핵을 이고 살며 밖으로는 자국 중심주의의 물결이 살벌한 칼춤을 추는 가운데 국가안보와 경제에 집중해야 할 이때 난장판이 된 정치 상황에 모두가 넋을 놓고 있지 않은가.
북한보다도 가난했던 시절을 이기고 전 세계 국력 순위 6위의 부강한 나라를 만든 우리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이 혼란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를 살피다 보면 그 꼭짓점에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좌파 세력의 득세와 한반도와 세계의 안위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는 북한 핵 개발의 출발점이 김대중 정권임을 고발한 전 국정원 직원의 기록… 이 절박한 시점에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편집자 주]
미군 부대 생활… 이념과 멀어지다
미군 부대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나 자신이 서서히 이념과는 조금씩 멀어져 가는 걸 느꼈다. 미군들과 섞여 지내면서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생각도 차츰 바뀌게 되었다. 소위 말하는 GI(미군 병사) 문화만 보더라도 우리보다는 여러모로 크게 앞서 있는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멀쩡하던 녀석도 미군 부대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두 반미주의자가 되어 나온다”고 하는데 나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 나는 반미주의자로 들어갔다가 비록 친미주의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반미주의에서는 탈피해서 나왔다. 나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말년 병장 시절에 군대 내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88서울올림픽 경기를 보았다. 그리고 그해 11월 말 전역했다. 정확히 30개월 9일간의 군대 생활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대개 27개월 복무하고 제대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대학 다닐 때 교련 훈련을 두 학기 이수하긴 했지만 휴학으로 인해 1학기만 두 번 이수했다는 이유로 단 하루도 복무 단축 혜택을 받지 못한 것이다.
제대 후 복학… 또 다른 혼란과 방황
대학에 복학해 보니 모든 게 변해 있었다. 같이 입학했던 동기들은 이미 졸업하고 없었다. 동유럽 공산권이 무너지면서 운동권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았다. 민주화 조치와 올림픽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 자체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모두 방향을 잡지 못해 갈팡질팡했다.
나는 복학하고 나서도 한동안 방황하며 보냈다. 후배들 틈에 끼여 그럭저럭 학교는 다녔지만 열심히 공부하지는 못했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은 마음잡고 고시공부나 해 주기를 원했다. 나는 ‘혼자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고시 공부를 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사법시험에는 한 번도 응시해 보지 않았다. 지난번 도청사건 이후 많은 언론들은 나를 실패한 고시병 환자로 묘사했다. 나로서는 기분이 과히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사법고시 시험장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사실은 변변히 준비한 적도 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의 책 제목이 아니라 나의 현실
나는 고시 준비를 하는 것도 아니고 운동권에 투신한 것도 아닌, 그야말로 어정쩡한 상태가 되어 갔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주변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 졸업이 가까워지자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빵 문제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란 말이 더 이상 블라디미르 레닌의 책 제목이 아니었다. 바로 내 문제였다.
그래서 우선 사법시험보다는 조금 더 만만하게 보이던 외무고시를 보기로 했다. 사법시험을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었다. 행정고시를 보자니 별로 전망이 없어 보였다. 그럭저럭 외무고시 1차는 무난히 합격했지만 2차는 준비 부족으로 시험 중간에 나와 버렸다. 1년 더 재수해 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공부를 더 할 돈도 기력도 없었다.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보안사 파일 폭로’ 사건과 ‘사노맹’ 사건
복학 후 나에게 충격을 준 사건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윤석양 이병의 ‘보안사 파일 폭로’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 노동자 연맹(社勞盟)’ 사건이었다.
나는 1989년 복학해 남궁호경 교수로부터 형법총론을 배웠는데, 이 괴짜 교수님은 형법은 강의하지 않고 국가보안법 얘기만 했다. 사실 국가보안법은 석사과정에서나 다루어야 할 과목이지 대학에 갓 들어온 새내기들이 배울 과목이 아니었다. 아무도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것은 남궁 교수가 자신의 교권을 남용한 처사였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남궁 교수는 몇 년 후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남궁 교수는 학생들에게 두 권의 책을 과제로 주었다. 한 권은 ‘남영동 24시’이고 다른 한 권은 ‘보안사’라는 책이었다. ‘남영동 24시’는 김근태 씨가 경찰청 대공분실에서 고문당한 경험을 기록한 책이고, ‘보안사’는 김병진이라는 재일교포 청년이 보안사에서의 근무 경험을 기록한 책이었다.
김병진은 신림동에서 간첩 활동을 하다가 보안사에 체포된 후 보안사에서 역용(易用‧자수한 간첩이 협조자로 바뀌어 활동하는 것)으로 일하다가 일본으로 탈출한 후 그 책을 썼다고 한다.
나는 윤석양 이병이 폭로한 보안사 내부의 여러 일들이 내가 ‘보안사’라는 책에서 읽은 것과 똑같은 데 놀랐다. 상관의 이름이나 내부의 분위기‧업무 행태와 구조가 책에서 보았던 내용과 비슷한 게 많았다. 무엇보다 나는 일개 육군 이병이 정보기관뿐만 아니라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을 수 있다는 데 대해 놀랐다.
이때 나는 ‘정보기관이란 데에 한번 들어가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직접 들어가 ‘우리나라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국정원 입사를 결심하기까지
정보기관의 문을 두드리기까지 내겐 많은 주저와 망설임이 있었다. 나도 오랫동안 정보기관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보기관에 들어가기로 결심하면서도 ‘내가 위장취업을 하는 게 아닌가?’라고 자문해 보기도 했다. 경찰서를 들락거리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스스로 골수 문제 학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보기관이 나의 적성에 맞는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었다.
흔히 “20대에 좌익에 빠지지 않으면 가슴이 없는 사람이고, 40대에도 여전히 좌익에 빠져 있으면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고 말한다. 나도 20대에 한때 깊이 좌경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2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생각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문득 깨달은 것은 ‘현실 세계를 이념의 틀에 억지로 구겨 넣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이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석양 씨는 월간중앙 2004년 7‧8월호에 ‘아담의 곪은 사과’라는 자전적인 글을 게재했다. 그는 그 글을 통해 보안사 파일을 폭로하고 양심선언을 하며 그 전후에 겪었던 내면적인 갈등을 담담하고도 생생하게 표현했다. 그 글을 읽고 나는 우선은 먼저 들어가서 직접 보고 나서 판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기회를 빌려 윤석양 씨의 용기와 희생에 경의를 표한다.
자주적 사회주의혁명 노선의 ‘사노맹’… 안기부에 일망타진
당시 나는 사노맹(社勞盟)에 가입한 활동가는 아니었지만 그들이 지향하는 노선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박노해 시인이 발간하던 ‘노동해방 문학’이나 여러 가지 유인물들을 통해 그들의 활동 내용이나 지향점 등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제목조차 잘 기억나지 않지만 김미영인가 하는 여 조직원이 쓴 수기 형식의 책도 읽었다. 그 책은 안기부 도서관에서 다시 본 적이 있다.
당시 나는 NL계열(주체사상파)보다는 PD계열(사회민주주의‧민중민주파)에 조금 더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이니 ‘친지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일성 동지)’이니 하고 외치는 친구들을 경멸했다. 북한을 대안으로 보는 시각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자주적으로 남한의 사회주의혁명을 달성하려는 사노맹이 마음에 들었다. 그들이 말하던 소위 ‘과학적인 투쟁’ 방법론에도 공감했다.
그런 사노맹이 안기부에 의해 일망타진되는 것을 보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전국에 있는 사노맹 중앙위원들이 하루아침에 검거되었다. 이는 안기부 정형근 수사국장의 작품이었다고 한다. 갑자기 ‘도대체 안기부라는 데가 어떤 곳이기에 한날한시에 사노맹을 일망타진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의아심이 생겼다. 그러면서 정보기관에 들어가서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이 점차 굳어졌다.
△김기삼 변호사의 블로그(https://niswhistleblower.tistory.com/)를 방문하면 좀 더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정리= 박혜수 편집위원
프로필
김기삼
△서울대 법대 졸업
△펜 스테이트 디킨슨 법대 비교법학(LLM) 석사 졸업
△국가정보원 8년 근무
△2003년 미국 망명
△2011년 망명 확정
△(현) 미국 뉴욕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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