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43] 영미의 라이벌

이 시간 주요기사

뉴스 > 연재소설

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2-13 06:30:14

실질적으로 달라진 건 별로 없었지만 사장 아들이 직원들에게 호의적이란 사실만으로 그들은 다른 회사와 다르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그것이 민주적 변화라고 착각했다.

변화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를테면 한 시간마다 작업장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 사이렌이 울리면 작업하던 동작을 멈추고 허리를 펴든가 물을 마시러 가든가 할 수 있도록 잠깐의 공식적인 휴식이 주어졌다. 단 10분이었다. 그러나 10분의 ‘틈’은 신의 축복 같은 거였다.

대머리 양 부장이나 반백 정 이사의 으름장은 잠깐 효과가 있었다. 동이는 희숙에게 틈만 나면 계속 ‘노조 만들다 걸리면 나만 손해’라는 소릴 해댔다. 동이의 겁먹음에는 동이와 같은 부서인 영미의 부정적인 반응도 한몫했다. 영미는 요즘 동이가 희숙과 같은 방을 쓰더니 좀 유식한 척, 전태일이 어떻고 노동자 권익이 어떻고 하며 아는 체하는 게 못마땅했다. 그러곤 동이에게 희숙이 어떤 존재인지 꼬치꼬치 캐묻곤 했다.

인천 토박이 영미는 희숙의 등장이 껄끄러웠다. 공장 내에서 가장 예쁘다고 인기 끌었던 영미에게 희숙이란 존재는 영미를 순식간에 2인자로 끌어내린 눈엣가시였다. 영미는 작은 키에 통통한 체형이었다. 예쁜 얼굴이라 할 수 없지만 눈웃음이 매력인 귀여운 상이었다. 어느 조직이든 외모는 제 눈에 안경이든 아니든 그들만의 리그에서 순위가 매겨지게 되어 있다.

영미는 남자 직장 동료들이 점심 식사 후 자기에게 인스턴트커피·껌·초콜릿 등을 가져다주는 횟수가 줄어들고 농담하는 빈도수가 낮아지는 게 희숙이 자신의 몫을 가져간 거라고 생각했다. 영미 생각에 희숙은 무뚝뚝하고 멋 낼 줄도 모르는 촌스러움이 있지만 왠지 자신에게 없는 교양미 같은 게 풍겼다. 남자 근로자나 직원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며 말도 걸지 않는 그녀지만 남자들은 그런 희숙에게 거리를 느꼈고 그 거리감이 내재적 카리스마라고 생각했다.

동이는 희숙이 오기 전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영미와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영미가 일월에서 제일 예쁘다고 추켜세워 준 사람이 동이였다. 그런 동이가 이젠 희숙과 가깝게 지내고 영미에게 예쁘다는 말을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게다가 전보다 유식해진 변화는 분명 희숙의 영향이라 생각했다. 동이가 같은 조원들 서너 명과 점심 식사 후 공장 밖 나무 그늘 쉼터에서 주변 사업장에 퍼지고 있는 노조 설립을 언급하자 영미는 발끈했다. 그녀는 마치 사측 대변인처럼 굴었다.

“내가 일월에 들어온 지 만 6년 째야. 일월은 노조가 필요 없을 만큼 작업장 환경이 좋아지고 있어. 권지호 전무님이 우리 얘기 다 들어 주잖아. 일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일이 많아지고 있다는 건 회사가 커지고 있다는 거지. 그럼 우리가 받는 급여도 높아질 거고. 연말 보너스도 일월만큼 많이 주는 곳이 어딨어. 5만 원이나 주잖아. 그거 안 주는 곳 많아. 알면서 그래.”

희숙은 어이가 없었다. “일 많다고 크리스마스에도 일했잖아요.”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박선경 필진페이지 +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