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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과 좁은 길을 지나니 확 트인 세상이 펼쳐진다. 은빛 햇살을 태운 대청호 푸른 물결은 저녁을 찾아 떠돌고, 세상을 품은 풍경은 하루 동안의 결실을 셈하느라 몸과 마음이 분주하다.
이 가을, 몸을 낮추면 내 안의 작은 방이 들여다보인다. 숲 사이로 난 둘레길, 계단을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 검은 바위와 푸른 호수의 조화… 작은 예배당에 들러 경건한 시간을 보내도 좋을 것이다. 만추에 이르러 그 깊이를 더하는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수생식물학습원’을 소개한다.
바람보다 앞서가지 마세요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진 산골짜기에는 용이 들어와 산다. 대청호는 날아오르는 용을 닮았다. 그리고 날아오르는 용의 꼬리에는 수생식물학습원이 매달려 있다. 지도상으로는 작아 보여도 무려 6만여㎥에 달하는 광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수생식물학습원이 본명이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이곳은 ‘천상의 정원’으로 알려졌다. 2003년 시작할 때만 해도 수생식물을 통해 대청호 물을 보호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었으나 지금은 한 해 10만여 명이 다녀가는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이곳의 자랑은 어느 위치에서든 대청호 푸른 물이 보인다는 것이다.
천상의 정원은 ‘좁은문’을 통해 입장한다. 몸을 낮추면서 시작한 여행은 마음의 높이까지 낮춘다. 좁은 문은 꼭 한 사람이 지나갈 만한 좁은 길로 이어진다. 좁은 길은 말을 멈추고 홀로 사색하며 걸으라는 의미로 읽힌다.
좁은 길을 지나면 바위정원이 나타난다. 이곳 천상의 정원은 검은색 금강석회암 지대를 디디고 건설되었기에 검은 바위가 지천을 이룬다. 음양오행에서 검은색은 물(水)과 북쪽을 뜻한다. 천상의 정원 건물 다섯 동마저 짙은 회색이다. 주변 암석 경관과의 조화를 꾀한 설계로 보인다.
이어지는 길은 300m 목책길 ‘천상의 바람길’이다. 바람을 따라가는 마음으로 느긋이 걸으면 좋은 길이다. 이 길 끝에는 분홍색 핑크뮬리를 배경으로 그네 포토존이 있다. 분홍색 갈대와 푸른 호수와의 조화가 독특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곳.
금빛이 내려앉은 잔디밭을 지나 ‘꽃산 아래 벼랑길’로 접어든다. 대청호 제일의 비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이 길 위에는 바위 위에서 120여 년을 생존해 온 기적의 소나무가 있다.
흔히 암송으로 불리는 이 소나무는 뿌리가 자라나는 힘으로 바위를 뚫어 자기 살 공간을 확보했다. 하늘이 선사하는 햇빛과 이슬, 공중을 떠도는 먼지만으로 생존했으니 자연의 힘은 얼마나 위대하고 신비한 것인가.
이곳 전망데크에서 철제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240도로 시야가 확보된다. 넓고 푸르다. 대청호가 바다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생각해 보면 대청호의 가장 흔한 수식어가 ‘내륙의 바다’ 아닌가.
바람에게 길을 물으세요
‘호수 위의 찻집’에서 따뜻한 커피를 사 들고 호수 변에 나와 앉는다. 아직은 그래도 좋을 날씨다. 찻집 주변 호수에는 열대 수생식물 파피루스가 젖 먹던 힘을 다해 푸른 빛을 발산하고 있다. 생명이 다 하기 직전의, 노랑이 많이 섞인 푸르름이다.
파피루스는 고대 사람들이 종이 대신 사용했던 식물이다. 종이를 뜻하는 영 단어 ‘페이퍼’도 이 파피루스가 어원이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종이방동사니로 통한다.
찻집에서 나오면 수변 정자 ‘망월정’으로 길이 이어진다. 정자 옆으로 두 사람이 끼어 앉으면 딱 좋은 작은 그네가 있다. 달을 기다리는 것일까. 노부부가 사이좋게 어깨를 맞대고 앉아 그네를 흔들어 댄다.
호수를 바라보며 산책을 계속하다 보면 유럽의 고성을 연상시키는 ‘달과 별의 집’이 나타난다. 아름답지만 사람이 사는 거주하는 집이므로 조용히 지나칠 일이다.
집 앞으로 대청호 속의 육지, 육지 속의 대청호 ‘수련 연못’이 있다. 꽃은 다 지고, 줄기와 잎이 내년을 준비하여 누렇게 말라간다. 소멸하는 생명에게서 처연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커다란 동양화 액자 한 점이 길손을 기다린다. 사람들이 이끌리듯 그 안으로 들어가 그림을 완성한다. 액자 속 나무가 바람결에 이따금 몸을 흔들고, 푸른 호수는 햇빛의 각도에 따라 물 주름을 만든다.
움직이는 동양화를 뒤로 하고 계단을 오르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교회당’이 나타난다. 1.5평의 작은 예배당을 나무 의자 두 개가 채우고 있다. 그러나 시야는 오각형 창문 너머 푸른 호수를 향해 끝없이 뻗어 나간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교회지만 작다고만은 할 수 없는 공간이다. 사람들이 이곳에 놓아두고 가는 헌금은 지역사회에 기부된다고 한다.
바람이 불어 올 때는 침묵하세요
언덕을 내려오는 길목에 온실 4동이 자리 잡고 있다. 각기 분재원·실내정원·수련농장·다육이정원의 쓰임을 지니고 있다. 분재원의 가장 큰 볼거리는 가을 국화 분재다. 수목만 가능한 분재를 초본인 국화에 적용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도전이다.
국화는 강하다. 줄기는 죽어도 뿌리는 살아남아 여러 해 생명을 이어 간다. 몸은 비록 분재라는 작은 틀 안에 갇혀 있지만 국화꽃은 사방에 진한 향기를 흩뿌리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우물가 지나 바람길 정원까지 오면 이곳 천상의 정원을 얼추 둘러본 셈이다. 이곳부터는 길이 없으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 놓친 것들이 있다면 천천히 다시 살피며 돌아갈 일이다. 수생식물학습원은 오전 10시에 오픈해 오후 6시까지 운영한다. 일요일은 휴무다. 입장료는 일반인 기준 6000원이다. 수생식물학습원 홈페이지에서 예약 후 방문할 수 있다.
다음 달 18일부터 내년 2월까지 동절기 휴관에 들어가므로 서둘러 방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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